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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May 15. 2023

공연이 시작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거닐던 도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도시, 빈 소년 합창단의 천사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도시, 파이프오르간의 경건함이 900년 된 성당 안을 가득 채우는 도시, 그러니까 그런 우아함에 큰돈 쓸 각오를 해야 하는 도시,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 이 도시에서 첫 번째로 선택한 우아함은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에서의 오페라였다.


   어떤 자리의 티켓을 예매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뜻밖에 단순했다. 예약 가능한 남아있는 자리는 딱 두 종류, 가장 싼 자리와 가장 비싼 자리뿐이었다. 중간 가격의 대충 적당한, 그래서 그럭저럭 무난한 선택일 거야, 하는 안도감을 주는 자리는 이미 모두 매진이었다. 선택의 순간. 멀리서 기웃거릴 것인가, 한복판으로 들어갈 것인가. 경험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경험에 안락함을 더할 것인가.


   무엇에 홀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올리브오일 하나를 사면서 가장 싼 것을 찾고, 같은 값이면 조금이라도 양이 많은 것을 골랐던, 그렇게 일일이 따지고 나서야 겨우 장바구니에 담았던, 마트를 나서며 영수증을 확인해 보고는 이번에도 알뜰했다며 좋아했던 게 불과 한 시간 전이었는데, 그 순간에는 어째서 그렇게 씩씩하고 호방했을까. 눈 질끈 감고 클릭해 버려, 라는 말이 홀린 듯 나왔고 그 말에 아내는 정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티켓 하나당 209유로, 그날 판매하는 티켓 중 가장 비싼 티켓이 우리 손에 쥐어졌다. 아내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날의 모든 일정을 비웠다.




   공연은 저녁 7시부터 시작이지만, 오페라하우스 내부를 구경하자며 두 시간 일찍 숙소를 나섰다. 오페라하우스 입구에는 암표를 파는 몇몇의 남자가 미처 티켓을 구하지 못한 관광객들을 상대로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우리에게도 다가와 티켓을 내보이며 은밀한 거래를 제안했다. 후훗, 괜찮아, 우린 무려 209유로짜리 티켓을 가지고 있어.


   그날의 가장 비싼 티켓을 손에 든 우리는 들떴다. 한껏 꾸민 머리와 원색의 드레스, 구김 없는 양복과 미끈한 구두, 파티라도 가는 듯 차려입은 부티나는 사람들 속에서도 우리는 당당했다. 209유로짜리 티켓이 마치 캡틴아메리카가 지닌 방패라도 되는 것처럼 우리는 늠름했다. 한껏 차려입었어도 쟤네들 티켓 우리 것보다 쌀 걸? 미국 부자들은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입는다잖아. 말하자면 우린 미국 부자 스타일인거지.


   홀 입구에서 티켓을 확인하는 직원의 복장 역시 멀끔했다. 우리가 내민 티켓을 본 직원은 우리 자리로 가는 입구는 이곳이 아니라면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따로 안내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했다. 직원이 알려준 입구를 찾아가면서 아내와의 부자놀이가 이어졌다. 티켓 보고 놀라는 표정 봤어? 어이쿠, 감히 저희가 모실 분이 아닙니다, 하는 표정 아니었어?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의 내부 모습.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오페라하우스 내부를 둘러봤다. 중앙 계단에 자리한 화려한 조각상들과 함께 사진도 찍어보고, 넓은 테라스, 창 너머로 보이는 빈의 야경도 둘러보고, 무대의 양쪽 벽, 칸으로 나뉘어 있는 2층, 3층 관람석도 슬쩍 들어가 앉아보기도 했다. 이런데 막 들어가도 되나? 뭐라 할지도 몰라, 하며 조심스러워하는 아내에게 비싼 티켓이 심어 준 터무니없는 허세를 떨었다. 뭐라 하면 우리 티켓 보여줘, 그럼 아마 이럴걸? 어이쿠, 이런 누추한 곳에 있으실 분이 아닙니다.


모차르트, 조율사. 둘 다 빈에서 음악에 미친 사람.


   우리의 자리는 앞에서 여섯 번째, 정면으로 커다란 무대가 보이는 자리,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몸짓과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연주자들의 군무를 볼 수 있는 자리, 율리시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매일 기도하는 페넬로페의 가엾은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자리, 공연 전, 홀에서 드레스와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연어카나페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숙소에서 챙겨 온 킷캣과 생수를 꺼내 먹긴 했지만, 그래도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 다시 한번 어깨가 으쓱해지는 209유로짜리 자리.


   공연이 곧 시작됨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와인을 마시던 홀에, 야경이 보이던 테라스에, 조각상과 포즈를 취하던 중앙계단에 흩어져 공연을 기다리던 관객들이 각자의 자리를 채운다. 숨죽인 관객과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무대 한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가운데 높은 단상에 자리 잡는다. 숨을 한번 크게 고른다. 지휘자의 오른손에 들린 지휘봉이 춤추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오페라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 Il ritorno d`Ulisse in patria, SV 325: Prologue 고요하던 공연장에 퍼진다. 그리고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에서의 공연이 시작된다.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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