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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le May 09. 2023

여기 있으면 좋겠다 싶은.

 유럽의 여행 정보를 제공하는 카페에서 빈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 숙소는 무조건 링 안으로 잡으라고 한다. 링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빈의 도심을 둘러싸고 있던 굳건한 도시 성벽을 철거하고 건설한 원형 도로다. 호프브루크 왕궁이나 스테판 성당, 오페라하우스 같은 빈의 주요 관광지가 대부분 링 안에 있으니 여행을 다니기 더없이 좋은 위치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만큼 가격이 비싸고 사람도 많으니 말이다.  


 우리는 링에서는 멀지만, 대신 쇤브룬 궁전은 가까운 지역에 숙소를 구했다. 쇤브룬 궁전은 정원이 굉장히 넓고 아름다운데, 궁전 관람은 유료지만 정원은 무료입장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쇤브룬 궁전을 달리고, 저녁 산책도 할 수 있다! 게다가, 한 달 기준 숙박비도 무려 100만 원 가까이 저렴했다!


 숙소의 호스트는 은퇴한 노부부였다. 온화한 미소를 띤 할아버지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다녀갔다고 했다. 역시, 한국 사람들은 가성비 좋은 곳을 잘 찾아내는 것 같다. 식기세척기와 오븐의 사용법이라던가, 공용 세탁기를 쓸 때는 50센트 코인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마친 할아버지는 테이블에 커다란 빈 시내 지도를 펼쳤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짚어 가며 관광지 설명을 하던 할아버지는 서역(WestBahnHof)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일요일에도 마트를 오픈한다고 들었어요. 오스트리아의 마트는 일요일에 대부분 문을 닫거든. 토요일도 평소보다 일찍 닫아요. 아마 오후 6시쯤? “

 우리가 빈에 도착한 날이 토요일이었고, 시곗바늘은 오후 6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음식점도 문을 닫고, 마트도 문을 닫는다. 할아버지의 설명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서둘러 작별인사를 한 우리는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마트가 있다는 서역으로 향했다. 그곳은 지하철 역 안에 있는 작은 마트였는데, 우리처럼 미리 준비하지 못한 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느긋하게 물건을 고를 여유가 있는 마트는 아니어서 당장 필요한 것들만 몇 가지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마트는 오스트리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Billa나 Spar 보다 가격이 꽤 비쌌다. 슈테판 성당 근처에 있는 Billa도 주말에 문을 열었다. 다만, 모든 품목을 판매하는 건 아니고, 식료품 정도만 살 수 있다.


 일요일에 오픈하는 마트는 늘 분주했다. 한국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마트나 음식점은 모두가 쉬는 휴일에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니까. 휴일에 문을 열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텐데,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휴일은 모든 노동자가 휴식을 취하는 날이었다.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익숙해지면 미리 준비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휴일을 즐길 수 있으니 이것도 꽤 괜찮은데.


아늑한 우리의 숙소. 10유로 와인과 홈메이드 리조또.

 한 곳에서 오래 머물다 보면 외식도 지겨워진다. 체바피도 슈니첼도 하루이틀이지... 그래서 집밥을 해 먹기 시작했다. 아침은 간단하게 야채와 빵, 요거트로, 저녁은 제철에 나는 식재료를 사다 파스타나 리조또를 만든다. 한식이 간절할 때, 근처에 한인마트가 없다면 인스턴트 라면 세계 점유율 1위라는 인도미 라면을 끓여 먹는다. 그럼 그리운 동양의 맛을 조금은 채울 수 있다.


 다행히 물가가 비싼 유럽도 마트 물가만큼은 한국보다 저렴했다. 그리 많지 않은 돈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돈을 아껴야 하니까, 마트 물가가 저렴한 건 굉장히 큰 장점이다. 요리를 하는 것은 여행의 또 다른 재미가 된다. 이 나라에서 많이 먹는 음식은 뭘까. 우리나라 보다 가격이 얼마나 싼가, 또는 얼마나 비싼가. 그렇게 구경하다 보니 우리의 공식 물가 비교 상품도 생겼다. 모든 나라에 다 있는 상품. 코카콜라라던가, 바릴라 파스타면 같은 것. 다른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을까 지켜보기도 한다. 몇 번 따라 사보기도 했다. 맥주나 치즈 같은 건 성공했고, 시리얼바는 실패했다. 우리에게는 너무 달았다.


 빈의 마트에서 즐겨 사는 건 우유와 치즈, 빵 그리고 소시지다. 한국보다 가격도 저렴한데 맛도... 말해 뭐 해... 가공치즈의 가격으로 자연치즈를 먹을 수 있으니 너무 행복하다. 한국에서는 소시지를 먹으면 늘 머리가 아팠다. 그가 좋아해서 가끔 먹긴 하지만 한두 개만 먹어도 머리가 아프니 손이 잘 안 갔다. 하지만 여기는 소시지의 나라니까, 하면서 집어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먹는 소시지는 아무리 먹어도 머리가 아프지 않다. 아질산나트륨이 적게 들거나 안 든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침 메뉴에 매일매일 소시지도 추가했다.  


비너베르크와 칼덴베르그 언덕. 빈은 와인이 생산되는 세계 유일의 수도라고 한다.

 우리는 29일 동안 빈에 머물 예정이라 한 달 교통 패스를 샀다. 지하철, 버스, 트램 등 시내에 있는 모든 교통편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고 가격도 7만 원 정도다. 카드를 찍고 타는 시스템이 아니어서 왠지 무임승차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종종 검표원이 출구를 막아서고 티켓 검사를 하는데, 그럼 드디어 이걸 쓸 때가 왔구나 하면서 당당히 티켓을 내밀었다. 그럼 슬쩍 곁눈질로 보고는 손으로 가라는 제스처를 한다.


지갑을 꺼내서 카드를 찍고 집어넣는 일 따위가 뭐 그리 불편한 일인가 싶었는데, 안 하니까 너무 편했다. 놀이동산에서 자유이용권으로 놀이기구를 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빈의 지하철은 배차 간격도 짧고(2분에서 5분), 거의 하루 종일 운행을 하니(평일은 새벽 1시까지, 주말은 24시간) 링 안에서 오페라를 보고 늦은 시간에 귀가해도 걱정할 게 없었다.  


걷기 좋은 빈의 거리. 왼쪽 사진은 비포선라이즈에 나왔다는 다리다.

 도심을 걷다 쉬고 싶어질 때쯤 크고 작은 공원이 나타난다. 궁의 정원을 무료로 개방하니 그 또한 공원이나 다름없다. 거리를 걷다 힘들어지면, 카페에 가지 않아도 지친 몸을 쉬어갈 장소가 있다는 것. 차가 다니지 않는 보행자 전용 거리는 산책을 좋아하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것들이다. 가끔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집에서 조금 먼 공원으로 아침 산책을 가는데, 대중교통이 무제한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멀리 산책을 다닐 수 있는 것 또한 좋았다.


 여기에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 싶은 위치에 자리하는 것. 나에게 빈은 그런 도시다. 오랫동안 살아보고 싶은 곳.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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