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사라예보에서 베오그라드로 넘어왔다. 정말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긴 여정이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 사이 국경을 이루는 드리나강을 건너자 드넓은 평지가 펼쳐졌다. 쭉뻗은 도로 양쪽으로는 포도밭과 아담한 집들이 평화롭게 이어졌다. 흥, 자기네들은 이렇게 평화롭게 살고 있고만. 세르비아 국경을 넘기 전까지 총알의 흔적이 빠끔한 구멍으로 남은 집들을 보면서 왔기에 든 생각이었다. 국제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랬다. 사람들 표정도 좀 차가운 거 같고, 잘 웃지도 않는 거 같고, 나를 슬쩍 내려다보는 그 눈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스니아 내전의 시작은 세르비아 때문이었으니까.
베오그라드 숙소의 호스트는 답이 늦었다. 체크인 안내가 상세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숙소 문 앞에서 한참을 헤맸다. 열쇠보관함의 비밀번호가 알려준 것과 다른지 여러 번 해봐도 열리지가 않았다.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알려준 방법대로 해도 안된다고. 잠시 후, 아래층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발에 커다란 체구를 가진 할머니가 올라왔다. 손에는 열쇠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는 소녀 같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여기 있고, 여분의 수건은 여기에 있어. 그리고 말했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더듬더듬 한 단어씩 꺼내는 그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거 같았다. 나도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나도 영어를 잘 못해.
짐을 풀면서 더 필요한 것이 없는지 체크했다. 수건이 몇 장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영어로 메시지를 입력하다 지웠다. 그리고 구글 번역앱을 열어 한글을 세르비아어로 번역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번역해서 보면 되니 영어 말고 편한 언어로 말해달라고도 했다. 한참 후 할머니는 이미지 한 장을 보냈다. 갑자기 왜 이미지를 보내지 하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번역기를 돌려서 나온 결과를 캡처한 이미지였다. 할머니 너무 귀엽다! 이미지라니!
어떤지 베오그라드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면 적어도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정도는 현지의 언어를 쓰려고 한다. 크로아티아어로 안녕하세요는 zdravo. 하지만 식당이나 마트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간단하게 cao라고 했다. 고맙습니다는 hvala.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 역시 같은 말로 인사와 감사를 전했다. 모두가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발칸반도에 나란히 붙어 있고, 같은 남슬라브 인종이고, 게다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 종교 말고는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체바피를 즐겨 먹었다. 다진 고기를 숯불에 구워서 쫄깃한 빵과 양파, 카이막을 곁들여 먹는 음식인데. 어떻게 구운 건지 고기가 탱글탱글 육즙이 가득한 게 맛있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뷰렉이라는 빵을 먹는다. 얇은 밀가루 반죽에 치즈 혹은 버섯이나 시금치가 들어 있는데. 바삭함이나 기름짐의 정도는 다르지만 맛은 비슷했다. 언어와 음식, 문화가 비슷하니 세 나라가 아닌 한 나라의 다른 도시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한때는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같은 국가인 적도 있긴 했구나.
세르비아가 다른 두 나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키릴문자를 사용한다는 거였다. 로마자는 적어도 더듬거리며 대충 발음을 예상할 수라도 있지, 키릴문자는 매우 낯설었다. 다른 형태의 문자라면 그냥 외우면 되는데, 로마자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다른 발음을 내는 것들이 특히 어려웠다. 예를 들면 S 발음은 C, R 발음은 P처럼 생긴 글자를 사용한다. 그래서 스타벅스를 키릴문자로 쓰면 CTAPБAКC 다.
키릴 문자 중에서 가장 헷갈리는 건 3이다. 누가 봐도 숫자 3처럼 생겼는데, Z 발음이 나는 글자다. 칼레메그단 공원을 산책하다 '300'이라는 간판이 보여서 뭐지 했는데. 그건 Zoo였다. 동물원 간판을 보면서 복근을 드러내고 빨간 망토를 두른 300명의 군인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글자가 키릴문자다.
세르비아의 물가는 저렴한 편이라 호텔에서 커피를 마셔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우리나라 스타벅스 가격 정도?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보였던 호텔 모스크바는 러시아 아르누보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이 아름다워서 한번 가보고 싶었다. 1908년에 지어진 이 호텔은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했다. 아인슈타인, 파바로티 등 세계적인 유명인사들이 방문했다는 안내가 카페 메뉴판에 적혀 있었다.
메뉴판은 두꺼운 책자 같아서 무엇을 주문할지 고민스러웠다. 이럴 때면 우리는 옆자리 테이블에 관심을 둔다. 현지인이 시키는 건 뭘까, 하면서. 괜찮아 보이면 같은 걸 주문하고는 했다. 하지만 옆테이블 사람들은 영어로 샌드위치와 콜라를 주문했다. 뭐야, 관광객이네. 미국 아니면 영국 사람인가. 아니었다. 그들은 주문할 때를 제외하고는 무슨 언어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외국에서 만나면 나라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영어를 쓴다. 버스에서 만난 대만 학생과도, 튀르키예에서 만났던 우크라이나 사람과도 영어로 대화를 했다. 한국인뿐 아니라, 프랑스인, 독일인, 세르비아인 모두가 해외로 나가면 영어로 말한다.
나는 카푸치노 두 잔과 헝가리 초콜릿으로 만들었다는 케이크를 영어로 주문했다. ‘투 카푸치노, 디스 원.’ 언어를 잘하지 못해도 마주 보며 하는 대화는 통하기 마련이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는 에드 시런의 곡을 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며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를 소비하는 우리 모두는 같은 문화권 안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나라를 가도 도심에 스타벅스 하나쯤은 있고, 상점에서는 에드 시런이나 BTS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영어로 말을 하면 통하니까.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