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dle Mar 23. 2023

거인국을 여행하면 생기는 일

 내 키는 작은 편이다. 그래도 눈에 띄게 작은 편은 아니어서 살면서 큰 불편함을 경험한 적은 없다. 바지를 사면 당연히 기장 수선을 해야 한다는 것 정도? 물론 키가 5cm 만 더 컸어도 라는 생각은 늘 있다. 비행기 선반에 짐을 올릴 때나 도서관에서 가장 높은 곳에 꽂혀있는 책을 빌리려면 우리 집안 최장신인 그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평균보다는 작지만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친구들, 가족들이 있고 거리를 걸을 때에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니까. 그건, 평범에 속한다는 의미였다.    


 발칸반도의 사람들은 대부분 남슬라브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대부분 키가 크다. 남성은 182cm, 여성은 167cm 정도가 평균키라 하니. 우리나라에서는 장신에 속하는 키가 이 나라에서는 평균인 거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하고 느끼는 건,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정말이지 컸다. 한두 명만 큰 게 아니라 정말 다 컸다.




 스플리트에서 늦은 체크인을 했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나로드니 광장에 위치한 아르누보 스타일의 건물이었다. 눈에 띄는 건물이라 쉽게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미 어둑해진 이후라 호텔 주변에서 한참을 헤매었다. 호텔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건물 전체가 하나의 호텔이 아니라 층마다 다른 이름의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고, 간판도 현관 구석에 조그맣게 붙어 있어서 찾기가 어려웠던 거다.


 41시간째 씻지 못한 꾀죄죄한 몰골로 호텔 프런트 앞에 섰다. 전화로 체크인을 재촉했던 여자가 자리에 앉은 채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에게 관광세를 지불하고, 키를 건네받았다. 호텔 룸쯤은 그냥 알아서 찾아가도 되는데. 그녀는 방을 안내해 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을 다 일으키기까지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정말 컸다. 작은 얼굴에 턱끝까지 오는 금발머리,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녀가 앉아있을 때는 귀여워 보였는데. 귀여운 얼굴에 그렇지 않은 키를 가졌다. 거인국에 온 것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대충 짐을 풀고, 어서 침대에 누워야지 생각하며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그런데, 거울에 내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둥근 정수리의 검은 머리카락뿐. 세면대 위에 달린 거울은 나에게 너무 높은 위치에 있었다. 거울이, 거울로써,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씻는데 거울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생각하며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기 오른편으로 작은 선반이 있었다. 어매니티로 준 록시땅 샴푸와 컨디셔너 같은 것들을 올려두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라, 손이 닿지 않는다. 차라리 바닥에 내려놓을까 잠시 생각했다. 왠지 자존심이 상한다. 그냥 선반에 올려두어야지. 발 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려 간신히 올려두었다. 거품을 내어 머리카락의 기름기를 씻어내고, 꼼꼼히 헹궈내기 위해 샤워기 거치대에 손을 뻗었다. 손이 닿지 않는다. 발뒤꿈치를 올리고 점프를 해도 닿지 않는 높이에 있다. 그냥 고정한 채로 씻어내기로 한다. 여행객의 평균키를 몇 cm 정도로 가정하고 설계한 것일까. 역시 내 키가 5cm, 아니 10cm만 더 컸어도...


 다음날, 호텔 프런트에는 처음 보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나 거대한 금발의 미인들이었다. 생김새가 비슷한 것이 가족 같아 보이기도 했다. 가족이 운영하는 호텔인가. 우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는 호텔을 나섰다. 아침은 나로드니 광장에 있는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분위기가 괜찮아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앉았다. 발이 닿지 않는다. 괜찮다.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종종 겪는 일이다. 의자 끝에 살짝 걸터앉으면 된다. 우리는 주문한 에그 베네딕트와 아보카도가 올려진 오픈 샌드위치를 기분 좋게 먹고 리바 거리를 향해 걸었다.


 비수기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문을 열지 않은 가게들도 많았다. 붐비지 않는 것은 좋았으나 그만큼 볼 것도 없었다. 여행을 다니기에는 조금 아쉬운 시기. 그럼 이 거리를 걷는 사람들 대부분은 크로아티아인이겠지? 무심하게 걸친 편한 옷차림도. 눈부신 햇살 때문에 착용해야 하는 선글라스도. 대충 올려 묶은 머리도. 하나같이 모델 같은 시크함을 풍겼다. 전 세계 모델 중 크로아티아인 비중이 높다더니.


 이곳에서 우리는 가장 작은 사람들이었다. 늘 자신은 평균키 이상이라고 자부하던 그. 사람들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러든가 말든가 무관심한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은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조금 전에 같이 엘리베이터 탄 사람들. 여자랑 아이 포함 우리가 제일 작았어.”라고.  

 

버스표 가격이 왜 다른건데.왜 나는 더 싼건데!


 이 기분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발칸반도의 나라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모두 장신으로 유명하니까. 세면대에서 허리를 숙이지 않고 하는 세수는 사방에 물이 튀지만 허리가 아프지 않아서 괜찮다. 버스 티켓을 사면 일반 요금 보다 더 저렴한 가격의 티켓을 건네받는 것도 돈을 아끼게 되니 괜찮다. 거인국에 여행 온 소인의 기분으로 살아가면 된다.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