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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le Mar 10. 2023

오래 준비해 온 여행

 오래 준비해 온 여행이다. 어디로 떠날지, 얼마나 머물지는 계속 달라졌지만. 집을 정리하고 떠난다, 이 사실을 정한 건 은퇴를 결심하고 나서 부터니까.


 은퇴 후 3년 동안은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큰 변화 없이 살았다. 익숙한 우리 집, 늘 다니는 호수 옆 산책길, 단골 식당들... 집은 팔거나 세를 주고 자유롭게 살아보자고 말은 했지만, 막상 실행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걱정이 된다거나 두렵거나 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그냥 묘하다. 자유롭다.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들. 떠도는 시간이 길어지면 좀 불안해지려나. 아직은 불안함 보다는 설렘이 더 크다. 오래 준비해 온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근데 왜 절도 없다는 거지. 속담의 유래가 궁금하네. 아무튼, 우리는 언니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오면 머물 집을 구하겠지만, 정착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부산? 대전? 아니면 서울? 살고 싶은 장소는 여러 번 달라졌다. 여행의 준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언니의 휴가일정과 비싼 바르셀로나 숙박비 그리고 크로아티아의 쉥겐조약 가입으로 여러 번 달라진 일정은 스플리트 일정을 줄이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세르비아 일정을 추가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유럽의 화약고, 내전,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로만 알고 있던 나라. 하지만 물가는 저렴했고,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이슬람 문화와 정교회 문화가 어우러져 익숙한 유럽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유럽에도 이슬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째 바뀐 일정이 더 마음에 든다.




 로마 왕복으로 항공권을 끊었다. 아부다비를 경유하는 에티하드 항공이었다. 인천에서 아부다비까지 10시간, 공항에서 4시간 대기 그리고 6시간, 로마에 오기까지 무려 스무 시간이 걸렸다. 로마 시간 오전 6시, 우리는 별생각 없이 12시간 후인 오후 6시에 출발하는 스플리트행 항공권을 예약했다. 12시간이나 여유가 있으니 로마 시내나 다녀오지 뭐,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가족 여행 전 미리 로마 지리도 좀 익혀두면 엄마를 모시고 다니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우선 짐부터 맡겼다. 짐 하나당 10유로. 총 4개의 짐을 맡겼으니 40유로. 5만 원이 넘는 돈이다. 아깝긴 했지만 캐리어를 끌고 로마 시내를 다니는 건 무리니까, 하며 위안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을 나와 본 하늘은 몹시도 파랬다. 우리나라에서 어쩌다 한 번 볼까 말까 한 청명한 하늘색이었다. 새벽같이 시내를 다니니 관광객이 많기로 유명한 로마 시내가 한산했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심지어 트레비 분수 앞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집을 떠난 지 29시간째. 배가 고파졌다. 식사를 하고 싶어 나보나 광장 쪽으로 걸었다. 한참을 다닌 것 같은데 아직 시간은 오전 10시. 식당은 11시는 되어야 하나둘 오픈한다고 했다. 분수 앞에서 사진도 찍고, 젤라또 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점점 눈이 감겼다. 분명 땅을 딛고 있는데, 공중을 허우적 대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오픈하자마자 들어가는 건 없어 보이잖아 해서, 5분을 더 기다려 식당에 들어갔다. 여행 정보 앱에서 추천하는 가성비 높은 그 식당에는 동양인 관광객들만 들어섰다. 현지 맛은 얼마나 다른지 느껴보자며 우리는 까르보나라와 마르게리타를 주문했다. 그런데 어째 마르게리타 맛이 익숙하다. 분명 한국에서도 많이 먹어본 맛이었다. 혹시, 냉동식품? 아닐 거다. 분명 내가 피곤하고 졸려서 맛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성 베드로 성당 입장을 기다리는 긴 줄


 식당을 나와 바티칸으로 향했다. 천사의 다리를 건너 성 베드로 광장에 도착하니 텅 빈 로마 시내에 없던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 와있는 것 같았다. 무엇을 위해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광장을 따라 길게 늘어선 줄 가장 뒤에 가서 섰다. 한 남자가 앞에 서있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줄이 무슨 줄인가요, 여기서 기다리면 시스티나 성당에 갈 수 있나요?”

 ”저도 몰라요, 그럴 것 같아 서있는 거예요. “

 그들도 우리처럼 무슨 줄 인지도 모르고 서있는 거였다. 줄은 생각보다 빨리 줄어서 30분 정도 기다리니 입구에 도착했다. 성 베드로 성당이었다. 비몽사몽 한 정신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니 베르니니가 만든 발다키노니 하는 것들을 보고 나와 공항으로 향했다. 집을 떠나온 지 34시간째였다.


 프로펠러가 달린 아주 작고 귀여운 비행기를 타고 스플리트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니 오후 8시. 어느덧 하늘이 깜깜해졌다.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셔틀버스는 벌써 끊겼다고 했다. 당황하고 있을 때 체크인할 호텔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언제 체크인할 것인지를 묻는 전화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시내버스를 타야 하나 택시를 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곁에 서있던 택시기사가 말을 걸었다. 어디선가 50유로 정도면 시내까지 간다고 들었다. 50유로면 괜찮다. 눈꺼풀이 무거웠고, 눕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다.


 짐을 싣고 공항을 나설 때 택시 기사가 말했다. “도로 공사 중이라 조금 돌아가야 해요. “ 미터기의 숫자는 빠르게 올라갔다. 세상에, 80유로. 원화로 10만 원이 넘는 금액이다. 그래도 편하게 왔으니까 괜찮다. 괜찮다.

 올드타운에는 차가 들어갈 수 없기에 캐리어를 끌고 호텔로 걸어갔다. 전화를 했던 직원과 인사를 나눴다. 키가 아주 크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젊은 여자였다. 그녀의 안내에 따라 체크인을 하면서 관광세를 지불했다. 난 4일 동안 있는 것 같은데, 3일 치 관광세만 지불하란다. 제정신이 아니라 숫자도 못 세는 상태가 된 건가. 아무튼 하라는 대로 하고 방으로 들어가 드디어 침대에 누웠다. 너무나 포근했다. 집을 떠난 지 41시간 만이다.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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