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에서 오페라 리골레토를 본 적이 있다. 어느 여름밤, 그와 아크로폴리스를 산책하다 축제가 시작된 걸 알게 되었고. 티켓 오피스로 가서 남은 좌석이 있는지를 살폈다. 우리는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두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유튜브에서 한글자막이 있는 리골레토 영상을 찾아보고, 유명한 아리아는 흥얼거리게 될 만큼 반복해서 들었다. 하도 여러 번 보아서 막상 실제로 보면 시큰둥한 거 아냐 싶을 정도였다. 그건 괜한 염려였다. 폴짝폴짝 뛰는 열정적인 지휘자의 뒷모습, 더블 베이스의 낮은 저음, 목소리의 울림 같은 것들은 작은 화면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좋아서, 빈에서도 꼭 오페라를 보고 싶었다. 아테네 여름 축제 때 그랬던 것처럼, 티켓 오피스로 가서 적당한 공연을 예약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베오그라드에서 빈으로 이동하기 전날 밤.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지금 어떤 공연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홈페이지로 들어가 공연 일정을 살폈다. 카르멘, 보체크, 살로메, 율리시스의 귀환... 카르멘 말고는 다 낯선 이름의 오페라였다. 카르멘을 봐야겠다, 하며 티켓 예매 페이지로 들어갔는데. Sold Out. 4월의 공연은 모두 매진이었다. 낯선 이름의 다른 오페라도 적당한 가격의 괜찮은 자리는 모두 예약 마감이었다. 남은 자리는 아주 비싸거나, 싼 자리뿐.
아테네에서 소리가 조금 아쉬웠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조금만 앞자리면 좋을 텐데, 조금만. 비싼 티켓을 살까? 아니야 우리는 돈 없는 백수인데, 아껴 써야지. 내가 갈등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그가 말했다. 그냥 비싼 티켓을 사버려. 그래 또 언제 본다고. 한국에서 보는 것보다는 싸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합리화를 하며 비싼 티켓을 사버리고 말았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오페라를 봤을 때에는 무대 위 사람들의 머리스타일, 옷차림 정도만 보였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그들은 모두 멋지고 아름다워 보이기만 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우리의 자리는 앞에서 여섯 번째. 그들의 생김새와 찡그리는 표정, 어두운 무대에서 서둘러 자리를 잡기 위해 허둥대는 모습까지도 보이는 자리였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것이 있었으니. 무대는 높고, 우리의 자리는 낮다는 것.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제대로 듣기에는 너무 가깝다는 거였다. 기원전 161년에 세워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에서 들었던 소리보다도 작았다.
매주 일요일 호프브루크 왕궁 예배당에서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하고 빈 소년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는 미사가 진행된다고 했다. 미사를 보기 위해서는 미리 예약이 필요했는데, 가장 저렴한 좌석은 12유로, 가장 비싼 좌석은 43유로였다. 그는 이번에도 온 김에를 외쳤다. 인생에서 경험을 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그런 데는 돈을 아껴서는 안 되는 거다,라고. 마침 맨 앞자리에 떨어져 있는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는 어차피 우리 공연 중에는 대화 안 하잖아, 하면서 떨어진 그 자리를 예매했다.
이날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교회 3층에 자리한다는 거였다. 비신자인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이었다. 어디선가 연주와 노랫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보이지는 않는. 뒤돌아보면 3층 발코니 밖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활만이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그래도 소리만큼은. 아. 지금 생각해도. 너무. 없던 믿음까지 생길 뻔한 아름다움이었다. 미사 시간 내내 너무 행복했다. 미사가 끝나고 빈 소년 합창단이 앞으로 나와 노래를 불러주었다. 코앞에서 그들의 맑은 목소리를 듣는 것은 좋았지만, 그래도 다음에 온다면 12유로를 내겠다.
오페라 티켓을 예약하던 날, 빈 필하모닉의 실내악 연주도 같이 예약했었다. 역시나 그의 지름에 60유로를 주고 가장 좋은 자리를 잡았다. 공연 한 시간 전,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뒤돌아 그가 문 닫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쾅.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 열쇠를 집안에 두고 문을 닫아버렸어. 설마, 나 놀리는 거 아니야. 응, 아니야.
왜 이들은 번호키를 사용하지 않을까. 그게 그리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호스트에게 연락해 그의 집까지 보조키를 받으러 가야 했다. 당연히 집 근처에 거주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늦지 않게 공연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그들은 집에서 무려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빈 끝자락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호스트 할아버지는 열쇠를 건네주며 말했다. 서둘러 가면 마지막 연주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정말 마지막 연주는 들을 수 있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더블베이스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듯이 연주하는 그 어우러짐이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았다 정도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글 실력을 한탄할 만큼 좋았다. 그러다 보니 공연 전체를 다 듣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오케스트라 연주는 또 얼마나 좋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겨버렸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은 자주 있지 않았다. 티켓이 오픈되자마자 좌석은 모두 매진되었고, 입석 좌석만이 남아 있었다. 입석은 단돈 5유로! 선착순 입장! 우리는 한 시간 정도 일찍 공연장에 도착해 줄을 섰다. 우리 앞에는 몇 명 서있지 않았다. 모두 단정히 차려입은. 나이가 지긋한. 점잖은 인상의 사람들이었다.
공연 30분 전. 입장이 시작되었다. 입석 구역 앞에서 우리는 잠시 대기를 했다. 잠시 후 ‘삐’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그 점잖던 사람들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순발력 있는 그 덕분에 중앙 앞자리를 차지하긴 했으나 입석의 자리차지는 쉽지 않았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조금씩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 그는 나를 감싸고 두 팔에 힘을 꽉 준채 버텼다. 틈을 주지 마. 비켜주지 마. 그가 외쳤다.
그날의 지휘자는 리카르도 무티. 오케스트라 연주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뭔가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모든 악기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세심한 연주. 너무 아름다워서 몸이 붕붕 뜨는 기분이었다. 어쩜 이럴까. 입석 바로 앞자리 좌석은 116유로, 두 번째로 비싼 좌석이었으니. 몸은 힘들지만 소리만큼은 116유로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의 감동으로 흥분된 나는 오페라 입석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카르멘이 너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오페라 입석 티켓은 공연 당일 2시간 전부터 판매를 시작한다고 했다. 우리는 2시간 전에 맞춰서 도착을 했는데,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그래도 시야가 괜찮은 1층 티켓을 18유로에 살 수 있었다. 오페라하우스 입석은 지정 좌석제에다가, 기대어 설 수 있는 바와 자막을 제공하는 모니터까지 있어 뮤직페라인 입석보다 쾌적했다.
카르멘 공연이 시작되었다. 아아 1층 입석 자리는 비싼 209유로짜리 좌석보다 훌륭했다. 빈에서 음악을 즐기는 데 큰돈은 필요 없었다.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된다. 하얗게 머리가 센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서서 3시간을 버티는 걸. 과장 조금 보태서 상투적인 말로다가 음악을 듣다 보면 힘든 것도 잊게 되어버리는 걸.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