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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le Jun 15. 2023

여행의 목적

 우리는 빈 국제공항의 라이언에어 카운터 앞에 긴장한 얼굴로 섰다. 그건 두 개의 캐리어를 수화물로 붙이기 위해서였다. 딱 10kg만큼의 비용만 지불했기 때문에 책, 스피커 같은 무거운 물건들은 어깨에 맨 배낭에 넣었고, 기내 반입이 안 되는 화장품과 손톱깎이 그리고 몇 벌의 옷만 넣은 가벼운 캐리어였다. 라이언에어의 수화물 정책은 꽤 엄격한 것 같았다. 앞에 서있던 금발의 아가씨 두 명이 허용 무게를 넘겼는지, 바닥에 캐리어를 펼쳐놓고는 짐을 다시 싸기 시작했다. 우리 캐리어도 10kg을 넘으면 어떻게 하지. 배낭이 너무 크다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닐까. 드디어 차례가 다가왔다. 카운터의 직원은 우리의 여권이 왜 다르냐는(그는 남색 신 여권, 나는 녹색 구 여권이었다.) 질문만 했을 뿐 수화물 무게나 가방의 크기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약간의 긴장을 덜어내긴 했지만, 아직 가방검사가 남아 있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런 검사는 할 때마다 괜히 초조해진다. 스피커를 문제 삼지는 않을까. 로마 공항에서는 별 문제없을까. 그래서 난 여전히 몸이 굳은 채로 공항 면세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 굉장하지 않아.”

  “뭐가 굉장해?”

  “아니 한국 사람들끼리 인천국제공항도 아니고, 로마 공항에서 만난 다는 거 말이야. 해외 가족 상봉이라니, 뭔가 글로벌하지 않아?”

 하긴 그것도 그러네. 근데 만약 해외에 오래 살고 있는 거라면. 그럼 굉장하다기보다는 일상으로 느껴지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니 긴장이 다소 풀어졌다.


 우리는 이 여행의 본래 목적. 그러니까 엄마의 칠순을 기념한 가족 여행을 위해 로마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국에서 오는 식구들과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은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 공항 픽업 후 숙소까지 데려다주는 벤도 예약해 두었다. 다섯 명이서 테르미니역까지 가는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를 타는 것보다 저렴한 비용이 들었다. 돌이 울퉁불퉁한 바닥 위로 캐리어를 끌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가겠다 싶어 좋았다. 한동안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하루에 얼마를 썼는지 10센트 단위까지 계산해 가며 가계부를 적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일상이 된 여행이 아닌, 진정한 여행을 하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제시간에 로마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모드를 끄자 언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 우리 지금 착륙.

  - 비슷하게 도착했네. 이따 만나.

 가벼운 마음으로 답장을 하고, 수화물 찾는 곳을 확인 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수화물 벨트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벨트는 돌지 않고 있었다.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우리의 캐리어는 나오지 않았다. 잠깐 돌다 서다를 반복하던 수하물 벨트는 30분쯤 지난 이후 완전히 멈추었고, 전광판에는 완료 메시지가 떴다. 당황스러웠다. 뭐지. 우리 캐리어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데. 영화에서만 보던 수화물 분실 같은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난 건가. 여행하면서 짐을 잃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캐리어에 뭐가 들었더라. 수화물 무게 때문에 최대한 가벼운 거, 중요하지 않은 것만 넣기는 했는데. 아 속옷이랑 양말. 새로 다 사야겠네. 잠깐 사이에 많은 생각이 흘렀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빈에서 오는 라이언에어를 타지 않았냐며, 자기도 지금 한참 기다리고 있다면서 말이다.


 완료 메시지는 착오였다. 우리 주변으로 비행기 안에서 본듯한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짐을 찾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카톡 카톡. 언니에게 계속 메시지가 왔다.

  - 언제 나와?

  - 기사가 대기하고 있데. 얼마나 걸려?

 수화물 벨트는 여전히 멈추어 있었고, 짐이 언제 나올지 우리는 알 수 없었다. 칠십이 넘은 엄마가 13시간의 비행을 하고 와 피곤할 텐데. 배도 고플 텐데. 그냥 먼저 가,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수화물은 1시간 하고도 30분쯤 지나서 나왔다. 다시는 라이언에어를 타나 봐라. 아니지 가격이 싸긴 하니까. 기내 반입 가능한 짐만 들고 다니는 게 낫겠다. 아 편하게 가는 줄 알았더니만. 이 짐을 끌고 숙소까지 찾아가야만 한다.  


 아무튼, 숙소에 도착했다. 언니와 형부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언니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집이 엄청 좋아,라고 말했다. 일단 대문부터가 그랬다. 마치 성문 같은 커다란 대문이었다. 하지만 언니가 열쇠를 돌려 문을 열자 그 문의 1/3쯤 되는 크기의 쪽문만 열렸다. 머리 조심해. 이 커다란 대문을 두고도 머리를 숙여야 한다니! 그래도 숙소가 좋긴 좋았다. 근처에 스페인 계단이 있었지만 조용했고, 집안은 깨끗했다. 전실에는 1인용 소파와 청동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었고, 마치 갤러리처럼 하얀 벽에는 인상적인 그림이 걸려있었다. 큰 테이블과 하얀 소파 역시 다섯 식구가 편히 쉬기에 충분한 크기였다. 5년 동안 돈 모은 보람이 있네.


엄청나게 큰 숙소의 문

 여행 세 달 전쯤이던가. 바티칸 박물관 패스트 트랙을 미리 예약하기 위해 공식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예약하려는 날만 티켓을 판매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5월 1일은 노동절 휴일이었고, 4월 30일은 매주 마지막주 일요일, 한 달에 한번 있는 무료입장의 날이었다. 로마에서 하루는 바티칸을 보고, 또 하루는 시내투어를 하고, 그다음 날 차를 렌트해서 피렌체로 가는 일정이었으니 우리가 로마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 두 날 뿐이었다. 그 유명한 바티칸에 무료입장이라니. 우리 둘이 다니는 여행이라면 돈을 아낀다고 좋아했겠지만, 칠십이 넘은 엄마와 온 가족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돈을 더 내도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은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공짜만 좋아했나.


 바티칸 박물관 입장은 9시부터였다. 무료입장 후기를 찾아보니 빠른 입장을 위해 7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했다. 그때 가서 줄을 서도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고. 그는 먼저 가서 기다리나, 늦게 가서 기다리나 기다리는 시간은 같을 거란다. 그냥 충분히 자고 천천히 움직이자면서.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네. 우리는 느긋한 아침을 보내고 오전 11시쯤 바티칸에 도착했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도대체 끝이 어딘가 싶은 긴 줄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줄어들기는 해서, 그의 말대로 정말 두 시간쯤 기다린 후 입장을 할 수 있었다.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성당.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수두룩 했지만 사람들에 밀려다니느라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은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특히 시스티나 성당은 숨 막히는 공포가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 많은 바티칸, 비오는 콜로세움

 밖으로 나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가 긴 줄 뒤에 섰다. 바티칸 박물관에 비하면 이쯤이야 싶은 정도였다. 한 시간쯤 기다린 후 입장을 했다. 때마침 실내에서는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와 신부님들의 행렬. 오스트리아에서 본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성 베드로 성당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거대했다!  


 로마는 일정 내내 비가 내려서 우산을 들고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걸어야 했다. 우산을 들고 걸으니 몸이 더 빨리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왜 이럴까. 얼마나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여행인데.


피렌체 근교 숙소


 엄마의 칠순여행이기도 했지만, 직장인에게 멀리 떠나는 긴 여행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당연히 해보고 싶은 것들도 많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최대한 언니와 형부가 원하는 대로 맞추기로 했다. 언니는 아그리투리스모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동네 마트에서 현지의 재료로 장을 봐서 요리를 하고, 키안티 와인도 한잔하고 싶다고. 그래서 피렌체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는 농가 주택을 빌렸다. 방이 무려 다섯 개나 있고, 넓은 정원이 딸린 주택이었다. 집이 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이지 너무너무 컸다. 1층에는 메인 거실 하나와 벽난로가 딸린 작은 거실 그리고 커다란 주방이 있었다. 세상에나 거실이 두 개라니. 다섯 개의 방은 2층에 있었는데, 모두 우리 집 거실만큼이나 큰 방이었다. 창문을 열면 밖으로 올리브 농장이 펼쳐졌고, 여기저기 봄꽃도 활짝 피어 있었다.


 이 집에는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다. 쓰레기 버리는 날은 종류별로 따로 정해져 있었고, 외출할 때나 밤에는 모든 창의 덧문을 닫고, 문을 잠그고, 보안 시스템을 켜두어야 했다.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이 집에는 창이 너무나 많았다. 그게 귀찮다고, 이 멋진 풍경을 두고서 창을 닫아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을 열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밤에는 창을 잠그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토스카나는 날씨가 좋았다. 우리는 아침마다 올리브 농장을 산책하고, 키안티 드라이브를 하다 와이너리로 가서 괜찮은 와인도 몇 병 사고, 산지미냐노나 오르비에토 같은 소도시 구경도 하면서 여유롭게 지냈다. 여행 마지막 날은 피오렌티나 스테이크로 거하게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와이너리에서 사 온 와인을 마시며 마지막 파티를 했다. 이 와인을 한국에서 사면 얼마지. 검색해 보니 거의 두 배 정도의 가격이다. 돈을 쓰고도 번 기분. 이제 이 여행의 악재는 모두 끝이구나 하는 안도감 마저 들었다.


 가족 여행이 무사히 끝나고, 언니와 형부는 집으로 돌아갔다. 남은 엄마와 우리는 여행을 이어간다. 이제 다시 여행은 일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셋이서 짐을 이고 지고 피렌체 시내에 섰다. 좁은 골목길.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차량들. 앞으로 이곳에서 한 달을 보내야 한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어떡하지....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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