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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31. 2023

아내를 뺏겼다

   낯선 곳, 낯선 먹거리, 낯선 사람들 사이를 헤매다 보면 익숙한 무언가에 목마름을 느끼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아내 옆에 한 발 더 바싹 다가가게 된다. 가까이에서 익숙한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향을 맡고, 체온을 느끼면 점차 익숙함에 대한 갈증이 사라지고 또 다른 낯선 것에 다가갈 기운을 얻기 때문이다. 한 발 더 가까워진 간격 때문인지 여행지에서는 함께라는 느낌이 평소보다 더 강하게 다가온다.


   가까이 함께 걸으며 같은 것을 보고 듣지만,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늘 같은 건 아니어서 서로의 생각을 꺼내 보이며 이리저리 맞대고 다듬는다. 생각을 맞춰가다 보면 그래, 아내는 이런 사람이었지, 맞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어, 하며 톱니바퀴처럼 언제나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던 서로의 느슨한 닮음을 새삼 깨닫는다. 상대를 내쪽으로 바싹 조이려 하지 않는, 그래서 가끔은 끼익 끼익 소리가 나는 엉성한 톱니바퀴 같은, 느슨하게 닮은 사이였다는 것을 여행지의 낯선 것들이 일깨운다.




   평소에도 그런 편이긴 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 아내는 재잘재잘 말이 더 많아진다.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 먹는 것들이 모두 아내의 재잘거림을 끌어낸다. 가끔은 내 이성이 감성보다 앞서 한국에서도 매일 보이는 달이 뭐 이쁘다고, 혹은 비싼 음식값 생각하면 맛있어야 하는게 당연하지, 하며 아내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기도 하지만, 대개는 쓸데없는 이성 따위 억눌러 버리고 먼저 건네는 아내의 말에 내 말을 곱게 얹는다.


   억누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이성이 아주 없어지는 건 아니어서 아내와 함께 곱게 쌓아 올린 말들의 층수를 세어보며 뿌듯해한다. 나는 아내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이지, 공감되지 않아도 공감하려 노력하는 사람이지, 하며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아내는 나 없으면 어떻게 하나, 나 없으면 누구에게 재잘거리나, 나란 사람, 아내에게 없어선 안될 사람이구나, 하는 자만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장모님이 우리의 여행에 함께 하시기 전까지는.


황금비율인 구도와 각도.

   6일 간 자유롭게 곤돌라와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는 135유로짜리 티켓 3장을 손에 쥐고 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을 아내에게 보여주며 티켓이 풍경과 어우러지면서도 안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풍경 55에 티켓 35를 배분한 사진 구도에 대해, 감성뿐 아니라 티켓에 적혀있는 정보까지도 사진에 잘 나타나도록 32°로 펼친 티켓의 각도에 대해 말해 주려 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아내는 장모님과 곤돌라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대한 감탄을 주고받느라 바빴다.


무얼 보고 계신 건가요. 무슨 얘기 중이신가요.

   세체다의 눈부심에 말문이 막힐수록, 사소롱고의 장엄함에 온몸이 떨릴수록 아내는 장모님에게, 장모님은 아내에게 한 발씩 더 바싹 다가갔다. 함께 무얼 보고 있는 건지, 서로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지 궁금했지만 내가 끼어 들 틈이 보이지 않았다. 둘만의 여행이었으면 나에게 왔을 아내의 말들이 장모님에게로 향했다. 아내에게 향할 나의 말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묻혔다. 장모님에게 아내를 뺏겼다.


나는 외로웠다.

   돌 위에 서서 사진을 찍는 장모님이 혹 미끄러지시지 않을까 온 신경을 쓰는 아내의 시간과 눈앞의 황홀한 풍경 속에 풍경만큼이나 이쁜 딸을 사진에 담을 거라며 집중하시는 장모님의 시간에 나는 없었다. 온통 내가 아닌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외로웠다. 그럴 때마다 아내를 내쪽으로 조이고 싶었다. 끼익 끼익 소리가 나는 엉성한 톱니바퀴를 바싹 조여 누구 하나 끼어들지 못하도록 틈새를 단단히 메우고 싶었다.


   나 없으면 안 될 아내가 아니라 아내가 없으면 안 될 나였나. 나란 사람, 이렇게 약한 사람이었나.




   장모님은 아내가 결혼하기 전, 아내와 함께 보내던 시간을 가끔 이야기하셨다. 주말마다 늦잠 자고 싶어 하는 딸을 꾀어 북한산에 끌고 갔던 이야기나, 명절이면 딸과 함께 영화를 보고 외식하는 것을 명절에 해야 할 중요한 일로 여겼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장모님의 표정은 환했다. 북한산에서 길을 잃었던 이야기를 할 때는 엄마는 표지판도 안 보고 그냥 막 걷기만 한다며 아내가 끼어들고, 아내가 큰 맘먹고 데려갔던 비싸다는 식당은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사실 맛은 별로였다며 장모님이 말을 보탠다.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 아내와 장모님이 쌓아 올린 말들의 층수는 얼마나 높을까. 아내가 나와 결혼한 이후 더 이상 딸과 함께 북한산을 찾지 못하고, 명절이면 영화관 대신 시댁으로 가버리는 딸을 보면서 장모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나처럼 톱니바퀴의 틈새를 조이고 싶으셨을까. 어쩌면 내가 장모님에게서 소중한 딸을 빼앗은 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함께 걸을 수 있도록.

   할 말이 저리도 많을까 싶을 생각이 들 정도로 둘의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아내의 재잘거림은 장모님을 닮은 것이 분명하다. 여전히 서로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궁금하고 무얼 함께 보고 있는지 묻고 싶지만 이 여행이 끝나면 또다시 딸을 빼앗길 장모님이 말들의 층을 쌓아가시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 조금은 외롭긴 하지만 짧은 여행 기간, 이곳에서 만큼은 둘이 함께 걸을 수 있도록 몇 걸음 뒤에 떨어진 채로 둘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다.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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