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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le Oct 08. 2023

돌로미티로 가는 길

 옷장에 걸린 옷들을 하나씩 꺼내 둘둘 말아서 캐리어에 집어넣는다. 집안 구석구석 정리해 둔 소지품들도 꺼내어 정리한다. 마치 이곳에 오래 살았던 사람 같다. 짐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인가. 이게 다 들어가기나 할까. 왜 짐이 늘어난 것 같지. 아 실제로 늘어났지. 아침에 빵이랑 먹으려고 발사믹도 한 병 사고, 한인슈퍼에서 산 냉동 만두를 먹겠다며 간장도 한 병 샀다. 한국에서 가져온 짐 외에 쇼핑백 하나를 가득 채울 분량의 짐이 생겼다.


 먼저 짐 정리를 끝낸 그는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나갔고. 나는 불을 끄고, 창문을 닫고, 숙소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아침마다 뛰어다니던 위층 아이의 발소리, 창문을 열면 들리던 재잘거리는 새소리도 그리울 것 같다. 이제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문을 나선다. 마지막이다. 다시는 이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 찌릉컥. 문이 닫혔다. 끝이구나. 에어비앤비 앱을 열어 주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덕분에 잘 지냈어 고마워,라고.


 베로나에서 보낸 열이틀은 너무 짧았다. 하루면 충분히 다 돌아볼만한 크기의 베로나지만 ‘충분히’ 머물지는 못했다. 문어요리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 또 오자고 다짐했던 그 식당에 다시 가지 못했고, 베로나 성벽 둘레길을 걷지 못한 것도 아쉬웠다.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 했는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밀라노도 가고 베네치아도 가고, 가르다 호수가 보이는 시르미오네까지 다녀왔다. 근교를 다닐게 아니라 베로나에만 있을걸 그랬나. 아니지 여행의 시작이  ‘간 김에’ 였으니, 베로나에 온 김에 밀라노도 가고 베네치아도 가는 거지.  


이탈리아 여행을 위해 다운로드한 기차와 버스 앱


 주로 한 도시에서 한 달 정도를 머물렀지만 기차나 버스를 타고 근교 이곳저곳을 많이도 돌아다녔다. 4주 이상 머물면 에어비앤비 할인도 많이 돼서 한 곳에 오래 머물면서 다니는 여행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유럽 내 이동은 서울 근교 여행을 하는 것만큼 어렵지 않으니까.

 

 코로나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아~주 컨택리스 하게. 버스 티켓을 사느라 길을 헤맬 필요도, 긴 줄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버스 티켓도 앱결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입도 카드 연결도 아주 간단했다.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이탈리아어로만 된 화면을 보고도 가입이 가능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다만, 주마다 버스앱이 달라서 나의 폰에는 교통편 예약을 위한 이런저런 앱들이 깔렸다.


 그래도 버스티켓을 사느라 낯선 거리를 헤매는 것보다는 앱을 까는 편이 나았다. 티켓 활성화 방법도, 구매 동선도 앱마다 다 달랐지만 그래도 괜찮다. IT업계 기획자로 오래 일하면서 이런저런 앱을 다운로드하고 벤치마킹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보니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보고서를 쓸 필요도 없지 않은가!


 코로나가 가져온 이 컨택리스한 변화에서 유일하게 불편하다고 느낀 건 나의 IC칩 인식 방식의 카드였다. 다른 이들은 ‘띡’ 하면 끝인 결제를, 나만이 ‘이건 인서트 결제를 해야 해요.’라고 말하고, 출력한 종이 영수증에 사인도 해야 했다. 그럼 그들은 말한다. 너 아주 올드 시스템을 사용하는구나,라고. 출국하기 전에 컨택리스 결제 방식의 카드를 미리 만들 걸 그랬다.  


돌로미티로 가는 길, 창 밖 풍경


 베로나에 왔을 때처럼 울퉁불퉁한 바닥 위로 캐리어를 끌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멀리 우리가 탈 버스가 오는 게 보인다. 나는 베로나 버스 앱을 열어 세 명 치의 버스비를 결제한다. 버스 벽면에 붙어 있는 QR코드를 찍어서 티켓 세장을 활성화시키고 자리에 앉는다. 얼마 후 베로나 기차역에 도착한 우리는 볼차노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창밖 풍경이 벌써부터 예사롭지 않다. 하얗게 속살을 드러낸 산과 그 앞에 펼쳐진 포도밭. 드문드문 보이는 뾰족한 지붕의 집들. 엄마는 기차 안에서만 사진을 백장 찍을 기세다. 나는 사진 찍는 엄마를 바라보며 이곳에서 생산된 와인도 마셔봐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돌로미티에서는 더 이상 기차와 버스 티켓을 사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예약한 숙소에서 일주일 동안 사용할 버스티켓을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차오’ 대신 ‘할로’라고 인사하고, ‘그라찌에’ 대신 ‘당케’로 감사를 전하는 이곳 오르티세이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알프스 지역은 세계 1차 대전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의 땅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까지 독일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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