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장을 보는 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트렁크를 가득 채울 만큼의 일주일치 식량과 생필품을 담아왔다. 집에 도착하면 뒷좌석에 실린 카트를 꺼내 차곡차곡 쌓은 뒤, 주차장과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짐을 날랐다. 별로 힘들건 없었다. 그러니까 ‘무게’는 우리가 구매 여부를 결정할 때 따지는 조건이 아니었다.
여행은 다르다. 이곳에선 짐을 옮길 차도 없고, 카트도 없다. 우리는 ‘무게’ 때문에 이틀에 한번 정도는 마트에 가야 했다. 이 무게에 힘을 가장 많이 보태는 건 바로 물이다. 석회가 있는 이탈리아의 수돗물은 그냥 마실 수도, 끓인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무거운 생수를 들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숙소의 계단을 오르다 보면 이 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물을 어떻게 사다 먹는 건지 궁금해진다. 다들 집에 정수기가 있나, 배달을 시키나, 마트에서 현지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다들 우리처럼 생수 한두병 사가지고 가던데 다른 방법은 없나…
생수 말고도 ‘무게’를 차지하는 건 바로 술이다. 맥주 파였던 우리는 유럽에 머물면서 와인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이곳에서 자주 먹는 파스타나 리소토는 맥주보다는 와인과 더 어울렸다. 와인도 그렇지만 같이 먹는 치즈와 과일도 한국과는 비할 수 없이 저렴했다. 그러니 여기까지 온 김에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여행 내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엄마까지도. 와인 한잔은 건강에 좋다잖아. 옛 성인이 너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와인을 마시라고 했데. 이탈리아에서 와인은 술이 아니라 음식이지, 라며 엄마를 꼬드겼다.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엄마는 무거운 장바구니를 보며 안절부절못한다. 너무 무겁지 않나. 이건 내가 들게. 하며 기어이 짐을 나누어 들려고 한다. 그럼 그는 장바구니에 담긴 물건 중 부피는 크지만 가벼운 물건, 휴지 같은 걸 골라서 엄마에게 안긴다. 힘들지만 그래도 기어이 마트에서 장을 봐서 음식을 해 먹는 건 여행의 즐거움 때문이다. 절대 돈을 아끼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이곳 베로나의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까지 걸어서 15분은 가야 했다. 낭만은 있었다. 아주 오래된, 몇백 년에 걸쳐 고치고 또 고치며 견뎌온 건물 사이를 지나서, 베로나 중심을 따라 도는 아디제 강변을 따라 걷다가, 로마시대에 지어졌다는 피에트라 다리를 건너면 마트가 나왔다. 마트 또한 심상치 않아서 중세시대 성벽을 닮은 건물에 있었다. 아기자기한, 어디서가 하얀 꽃향기가 풍기는 곳. 그것이 베로나였다.
어느덧 6월, 베로나에서는 걷다 보면 땀이 총총 맺힐 정도의 더위가 찾아왔다. 이럴 때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좋지 않나. 하지만 이탈리아의 사람들은 거리에서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투명한 잔에 담긴 주황빛 액체가 올려져 있었다. 바로 아페롤 스프리츠. 베로나에 와서야 그게 눈에 보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저녁을 먹기 전 간단한 간식과 함께 술을 마시는 아페리티프를 즐긴다. 이때 아마도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이 아닐까 싶은 것이 아페롤 스프리츠다. 평소 더운 날은 시원한 맥주 한잔, 이라는 신념 같은 걸 가지곤 살았던 우리는 그동안 아페롤 스프리츠에는 무심했었다. 하지만 너나없이 앉아서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시니 그 맛이 궁금해졌다.
엄마와 아디제 강을 따라 한참을 걷다, 산 페르노 마조레 성당을 보고 나온 우리는 시원한 음료 한잔이 간절해졌다. 마침 성당 앞 광장에 문을 연 바가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아페롤 스프리츠를 주문했다. 낮술은 싫다는 엄마는 무알콜 음료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잠시 후 견과류, 간단한 스낵과 함께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아아 상큼하고 시원하면서도 기분 좋게 목젖을 자극하는 알코올의 맛이라니. 왜 그렇게 쉬지 않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기만 했나! 왜 여태 아페리티프를 즐기지 않은 건가! 살짝 출출한 오후 느긋하게 아페리티프를 즐기며 앉아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로나에서 첫 경험 이후 우리는 풍경이 좋은 곳에서는 어김없이 아페리티프를 즐겼다. 시커먼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을 찾아 헤매다 들어간 베네치아의 카페에서도, 복잡한 밀라노의 거리에서도, 바다처럼 푸르고 거대한 가르다 호수를 보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면, 뷰가 좋은 카페를 찾아 아페리티프를 즐기는 것. 그것이 뒤늦게 우리가 깨달은 유럽 여행의 즐거움이었다.
그 나라의 문화를 발견하고, 따라 해 보고, 이해하며 즐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한 도시에서 오래 머물며 깨달은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꺼이 마트에서 무거운 짐을 나른다.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