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티세이에서 우리는 여섯 번의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도착하고 출발하는 날을 제외하면 머무는 내내 돌로미티에 오르는 일정이었다. 그 일곱 밤 동안 우리가 머물 숙소는 입구에 분홍 작약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노란 삼층 건물의 꼭대기에 있었다. 천창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방마다 작은 테라스가 딸린 집이었다. 그동안 600년이 넘은 오래된 건물에서 지내다, 지은 지 50년 밖에 되지 않은 신축 건물에 오니 모든 것이 다 새것처럼 보였다.
오후 3시가 되도록 식사를 하지 못한 우리는 몹시 배가 고팠다. 각자의 방에 짐을 던져두고 식사를 하기 위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1층에서 금발 머리를 포니 테일로 묶은 여자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여자는 자신을 이 호텔의 관리인이라 소개하며 이곳의 아름다움에 대해 10분, 각종 편의 시설에 대한 소개를 10분쯤 했다. 그녀의 친절함은 너무나 고마웠지만 나의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이제 그만 적당히 말을 끊으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당신들도 세체다에 가나요? “
“네, 물론이죠. 소개 고마워요. 그럼 이제... “
“이곳에 오는 모두가 세체다를 원하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체다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지금은 운행하지 않아요.”
“네? 세체다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
“산타 크리스티나에 있는 케이블카는 운행하고 있어요. 거기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돼요. 놀랍게도 우리 숙소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답니다. 정말 환상적이지 않나요. “
아니! 이게! 무슨! 세체다행 케이블카 때문에 비싼 숙박비를 내고서 오르티세이에 숙소를 구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산타 크리스티나로 구했지... 가격도 훨씬 더 저렴했는데... 망연자실한 우리는 허기를 잊었다. 그대로 멍하니 서있었다. 멀리 앞서서 걸어가던 엄마도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는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눈앞에 빨간 케이블카가 지나는 게 보였다. 우리의 반응을 살피던 여자는 알페 디 시우시까지 가는 케이블카라고 알려주었다. 10분만 걸어가면 레시에사 모노레일도 탈 수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체다와 사소룽고의 전망이 뷰티풀 하단다. 그래, 괜찮다. 알페 디 시우시에 갈 수 있고, 산타 크리스티나까지 갈 수 있는 무료 버스티켓도 있으니. (무료 버스티켓이 있으니 숙박비가 저렴한 산타 크리스티나가 더 낫지 않았나 하는 건 잠시 잊자!)
다음날 우린 그 빨간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랐다. 케이블카에서 내린 우리는 비현실적인 광경 앞에 말을 잃었다. 우. 와. 행복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이 있을 수 있을까. 눈앞에 우뚝 선 저 바위산이 사소룽고겠지. 그 아래로 넓게 펼쳐진 초원이 알페 디 시우시고. 어쩜 이렇게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을 수 있을까. 그 사이에 난 길도 붓으로 그린 그림 같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꽃을 본 적이 있던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미운 구석이 없다. 엄마는 소녀처럼 초원에 엎드려 꽃받침을 하고는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구름과 꽃을 같이 담아보겠다며 이상한 자세로 엎드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너무 웃겨서 그 모습을 몰래 담아두었으나. 엄마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생각해서 차마 공개할 수가 없다. 혼자 보고 웃어야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우린 힘든 줄을 몰랐다. 매일 3만보씩 걷는 강행군이었지만 뻐근한 다리를 주무르면서도 다음날을 기대했다. 돌로미티에서 우리는 산행의 기승전결 없이 오직 절정만을 취했기 때문이다. 분명 힘들 오르막 길은 케이블카로 이동하고, 절정의 아름다운 풍경만을 발췌해서 보는. 마치 훌륭한 책인 것은 분명하지만 두꺼워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닌 발췌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트래킹을 하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산장이 나타났다. 음식을 주문하지 않아도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고,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쯤이면 배가 고팠기 때문에 우리는 자리에 앉아 아페리티프를 즐겼다. 가끔은 아예 식사를 대신하기도 했다. 파스타와 함께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시거나. 돌로미티 지역의 전통음식이라는 옥수수죽과 소시지를 주문해 맥주와 함께 먹었다. 돌로미티는 아직까지 오스트리아 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왠지 소시지와 맥주도 맛있을 것 같았는데, 역시나 그랬다. 해발 2000m에서 이런 호사라니. 사소룽고가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즐거움은 반드시 누려야만 한다.
이렇게 높은 산에 있는 식당이라면 비싸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았다. 시내 레스토랑이랑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저렴하기도 했다. 트래킹을 위해 집을 나서면 아름다운 돌로미티 풍경을 보는 것만큼이나 오늘은 산장에서 뭘 먹을까 하는 생각에 설렜다.
우리는 세체다에 두 번 올랐다. 한 번은 많이들 간다는 정석 코스로, 나머지 한 번은 lech sant를 돌아서 mt pic에 오르는 코스로. 첫 번째 코스에서 우리는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아니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을 여기서 다 만났다. 세체다의 유명세만큼의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 코스는 돌로미티로 유명한 어느 블로거가 추천한 코스였는데, 다른 트래킹 코스에 비해 매우 힘들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웠다. 하얀 구름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세체다 위를 지나가고, 그리 크지 않은 sant 호수는 세체다를 온전히 담아내었다. 사람 없는 한적한 호수에 오직 우리 셋만 앉아 있던 그 순간이 좋았다. 돗자리를 펼쳐놓고 김밥이라도 먹었어야 했는데, 물만 챙겨 온 것이 아쉬웠다. 그런데 나는 왜 아름다운 풍경만 보면 음식이 먹고 싶어 지는지 모르겠다. 돌로미티 트래킹글에 온통 먹는 얘기뿐이니..
세체다 산행을 위해 이웃 마을 산타 크리스티나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이 참에 옆마을 구경도 하는 거지. 케이블카가 고장 나지 않았다면 산타 크리스티나가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걸 모르고 갈뻔했다. 마을을 둘러싼 높은 바위산들. 해가질 무렵이면 그 틈으로 마을을 비추는 햇살이 포근했다. 워낭소리를 내며 한적하게 걸어가는 젖소들. 산악자전거를 타고서 먼지를 풀풀내며 내려가는 아이들. 호텔과 가게들이 많은 오르티세이보다 좀 더 정감 있는 모습이었다.
여섯째 날. 우린 그동안 정든 돌로미티와 인사하기로 했다. 빵과 샐러드로 아침을 먹고 주머니에는 버스 티켓과 발 가르데나 패스를 집어넣었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은 기분으로 돌로미티에 오르는 케이블카에 앉았다. 덜커덩 문이 열리고 우리는 정거장을 나섰다. 그리고 딱 트래킹 코스의 초입까지만 걸었다. 그리고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알페 디 시우시 안녕. 세체다 안녕. 사소룽고 안녕.
이 여행의 마지막이었다.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