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에서 돌아오면 새로운 취향이 하나씩 생기고는 한다. 오이와 토마토를 곁들인 튀르키예식 아침식사를 한다거나, 전에는 즐기지 않던 하얀 아스파라거스를 먹는 것 같은. 그 나라 사람들이 하는 걸 따라 해 보자 했던 것이 우리 몸에 익어서 남은 것들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풀향기, 과일내음을 풍기는 올리브유와 발사믹에 빠져버렸다. 이탈리아 마트에서 사던 것보다 거의 두세 배는 비싸 속이 쓰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여행 후에 남은 건, 거의 먹는 취향이었다. 산책을 하고 도서관을 찾아다니는 건 한국에서도 하던 우리의 하루 루틴이고, 여행지에서 새롭게 하는 건 관광지를 돌아다닌다거나 현지의 음식을 먹는 것뿐이라 그런가.
이번 여행에서는 새로운 취향이 생겼다. 바로 클래식 음악, 오케스트라 공연에 빠져버린 것이다.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는 빈필하모닉의 정기 공연을 본 이후부터. 아니 사실 그전부터 조금씩 클래식 음악에 친숙해지긴 했다. 유럽에서는 클래식 연주자들이 버스킹 하는 걸 흔히 볼 수 있으니까.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연주를 길거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빈필하모닉 공연을 한번 볼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한때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이나 뮤지컬을 자주 보러 다닌 적이 있다. 공연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역시 현장에서 들으니 다르네,라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클래식은 정말 달랐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어서일까. 아무것도 거치지 않은 조화로운 악기의 소리를 귀로 듣는 건 스피커를 통해 조금은 변질되었을 소리를 듣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물론 어마어마한 엔지니어들의 손을 거쳐 녹음을 하고 아주 비싼 스피커를 사서 듣는다면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만큼 좋은 스피커는 없으니까.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우리는 KBS클래식 FM을 하루종일 틀어둔다거나, 마음에 들었던 곡을 찾아 스트리밍 서비스로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뭔가 아쉬웠다. 그때의 분위기가 그리웠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오스트리아로 날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산시향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티켓값은 만원, 만원? 티켓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영화 한 편 가격도 안 한다니. 부산시향의 공연은 가장 비싼 티켓 가격도 2만 원을 넘지 않았다. 이런 게 복지인가!
공연장에서 듣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역시 달랐다. 더블베이스의 중후한 저음. 가늘게 떨리는 바이올린의 잔음. 이런 건 스피커를 통해서는 잘 들리지 않으니까. 물론 빈필하모닉의 연주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불리지 않는가. 그래도 충분히 훌륭하고 아름다운 연주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에서도 빈에서 처럼 음악을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엄마와 함께 여행하는 동안 엄마는 집안일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메뉴를 고민하고, 요리를 하고, 뒷정리를 하는 것. 모두 그와 내가 나누어 맡았다. 엄마는 그 시간 동안 매일매일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썼다. 하루도 빠짐없이 여행일기를 적어나갔다. 그것이 엄마가 이번 여행을 하며 세운 목표라고 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고백했다. 나 원래부터 음식 하는 거 안 좋아해.
평생 동안 수없이 해온 일일 텐데, 사실은 좋아하지 않았단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도 식구들을 위해 고기 요리를 하고, 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더덕무침과 감자전을 만들어 줘서. 매일 멀 먹일까 고민하는 얼굴 표정이 어둡지 않아서.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평생 함께한 엄마인데도 여태 모르던 것이 있었다. 여행은 그런 건가 보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 여행 이후에도 남을 이야기를 만드는 것.
여행이 끝나고 부산에서 새로운 집을 구하기까지 언니의 집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다. 엄마와 두 달을 넘어 거의 세 달 가까이 함께 지냈다. 우리는 둘 다 직장에 다니지 않으니 세 달 동안 거의 24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다. 그 시간은 전에는 몰랐던 것들을 알게 했다. 그는 장모님의 식습관, 은근한 애교와 유머 욕심을 알게 되었고. 엄마는 사위의 요리 솜씨, 은근한 배려와 그에 따르는 예민한 구석을 발견했을 거다. 그건 우리 사이를 감도는 공기를 가볍게 만들었다. 진짜 가족이 되었구나 하는 느낌.
우리가 부산에 내려오던 날 엄마는 몰래 참았던 눈물을 보였다. 해외도 아니고 고작 부산일 뿐인데. KTX 타면 2시간 반이면 오는데. 딸을 어디 먼 곳으로 떠나보내는 것처럼 슬퍼 보였다. 엄마는 KTX 할인도 되는데. 언제든지 부산 내려와도 되는데. 같이 부산시향 공연도 보러 가고 싶은데. 막내딸 사는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괜찮지 않나.
그렇게 여행은 끝나지 않고 이어져 다시 새로운 여행이 되는 거지.
이번 매거진은 민현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