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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Dec 17. 2023

여행은 다시 새로운 여행이 된다

   짧은 여행에는 늘 아쉬움이 있었다. 아쉬움을 없애려 시간을 분, 초로 쪼개며 새어 나갈 틈을 매웠고, 하루의 식사가 고작 세끼뿐이라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신중히 맛집을 골랐다. 여행 내내 얼마 안 남은 날을 세며 초초했고,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다가올수록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계획한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날이 되면 고작 며칠 지내겠다고 캐리어를 이리 정성껏 쌌었나 하며 허무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끌고 오는 캐리어에도 미련이 덕지덕지 들러붙었다. 공항 면세점에서 굳이 사지도 않을 기념품 구경을 하며 아직 여행이 끝난 건 아니다, 면세점 구경이야 말로 여행의 꽃이다, 하며 현실을 외면해 보기도 했지만, 이내 한국행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공항의 안내방송이 이제 꿈에서 깨어나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을 아침의 요란한 알람소리처럼 일깨웠다. 한국은 지루한 일상이었다.




   석 달 하고 2주를 더한 유럽 일정의 마지막 날, 스파게티와 와인으로 저녁을 차린 테이블 위로 그 어떤 날보다 많은 말들이 오가며 쌓였다. 모스타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고양이에 대해, 부자놀이를 즐겼던 빈 오페라하우스의 206유로짜리 티켓에 대해, 피렌체에서 먹은 그 어떤 것보다 맛있었던 짜파게티에 대해, 선물 같았던 오르티세이의 화창한 날씨에 대해 우리는 질세라 말들을 쏟아냈다. 모두 밝고 유쾌했다. 이 여행이 조금 더 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와인병을 보며 한 병 더 사놓지 않았다는 것을 아쉬워했을 뿐.


친퀘테레 이야기만으로도 한참을.


   퇴사를 하고, 얽매일 것이 없어지면서 여행 기간이 점점 길어졌다. 외국에 한번 나갈 때 최대한 오래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찾는 건 쉬웠다. 짧게 가든 길게 가든 어차피 비행기 값은 같잖아, 그러니까 말야, 숙소를 4주 예약하면 장기 숙박 할인이 30% 나 돼, 얼쑤, 그 나라 물가를 고려하면 한국에서보다 오히려 생활비가 적게 들 걸, 내 말이. 쉽게 찾아낸 이유를 아내와 함께 맞장구를 치며 공감하는 건 더 쉬웠다.


   기간이 긴 여행을 몇 번 다니다 보니 여행이 끝나는 날을 바라보는 느낌이 예전과 달라졌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함보다는 끝 이후의 날들에 대한 묘한 기대감이 마음에 채워졌다. 그건 뜻밖이었다. 여행의 끝은 늘 아쉬움이었고, 기대감 같은 건  지난 여행의 아쉬움을 동력 삼아 다음 여행을 다시 계획할 때나 생겼었는데 말이다. 뜻밖이었지만 그 묘한 기대감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긴 시간을 여행하다 보면 설레는 감각에도 얼마간 내성이 생겨 낯선 것들이 주는 자극에 둔해지고 여행이 어느덧 따분한 일상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때 떠올려보는 한국은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던 한국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긴 여행 후 돌아갈 한국은 둔해진 일상을 또 한 번 갈아엎어 줄 것 같은 가슴 뛰는 새로운 여행지로 다가오니까.


와인은 바닥을 보이는데.


   밥 한 끼 주문을 위해 외국어로 된 메뉴판을 보지 않아도 되는, 메뉴판에 적혀있는 음식 가격이 한국돈으로는 얼마인지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주문한 음식이 혹시 내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계산은 자리에서 하는지 카운터에서 하는지 팁을 주어야 하는지 안 주어도 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옆 테이블 사람들의 행동을 몰래 힐끗거리지 않아도 되는, 그러니까 아무 식당이나 골라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고, 맛있게 먹고, 다 먹고 나서는 배 좀 두드리다가 카운터로 가 카드만 건네면 되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는, 그런 멋진 곳을 여행하러 간다는 마음으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탄다. 이미 수백, 수천번 가 봤지만, 갈 때마다 너무 좋았어서 이번에도 다시 또 찾아가는 거라는 마음으로.


   여행은 끝나지 않고 이어져 다시 새로운 여행이 된다.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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