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문제 되는 것이 내겐 문제가 아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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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마지막이 왜 하필 911 테러였을까. 내가 느낀 건 그렇다. 타인의 비극과 나의 비극을 구분 하는 가장 큰 수단. 국내에서 일어난 대형 사건보다는 조금 더 먼, 누군가에겐 그저 텔레비전 속의 '사건'일 일 뿐이지만 그곳에 있는 어떤 이에겐 아주 큰 '비극'으로 받아들여질 사건. 그게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911 테러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 같은 일반인에겐 먼 타국의 사건이지만, 사회적인 문제를 보도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기자 이진에게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나와는 거리가 있는 비극. 이해하는 척 하지만 결국 이해할 수 없는 타국의 비극이야말로 희극과 비극을 관통하는 완벽한 사건이라 생각한다.
그 사건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는 건 하나인 것 같다. 비극이 아무리 크고 깊을지언정 누군가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 하지만 그 비극을 기억하자고. 그렇게 기억하고 또 기억하면서 그날의 비극을 반복하지 말자고. (이진의 대사로 다룬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말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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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어쩌면 사회적 문제의 희생양으로) 피해를 입은 타인을 위해 "다신 행복해지지 않겠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타인의 비극에 공감해 왔다. 타인의 문제에도 책임감을 느꼈고 그 책임감은 자신의 비극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표현됐다.
한 때 꿈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그는, 반 강제로 꿈을 잃으며 추구하는 성공의 그림이 바뀌었을 거다. 돈을 많이 벌어 가족과 함께 하는 것. 그 꿈은 이진이 최초 고졸 기자로 일을 시작하면서 어떠한 형태로든 만들어지고 있었다. 말인즉슨 이진에게 사랑만큼 중요한 감정이 가족을 위한 성공이라는 거다. 물론 그 성공 이면엔 기자로서의 사명감. 가족을 위한 게 아닌 온전히 자신의 미래를 위한 꿈도 뿌리내리고 있었을 거고.
그런 그의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911 테러였다.
그간 한국에서의 작고 큰 인재들에 회의감을 느끼던 그에게,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은 그냥 사건이 아니었다. 기자로서의 사명감. 타인의 비극에 공감하던 그의 세심한 성격이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을 넘어섰던 거 같다. 생과 사.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극에 잠식되며, 이진이 말했듯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치처럼 느껴졌을 거다. 개인적으로는 그 감정의 흐름에 공감한다.
이후 희도에 대한 사랑은 미안함으로 변해갔다. 그도 알고 있었을 거다. 말은 (사랑을 위해)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비극의 중심에서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아니었을 거다. 사랑이 3이라면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변화에 대한 희망. 그리고 성공에 대한 열망이 7이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을 골라 입는다는 그의 말은 마지막 노력이었을 거다. 비극의 중심에서도 희극을 떠올릴 수 있는 찰나의 순간. 물론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도 큰 위로가 되지 않았겠지. 그런 그의 마음을 탓할 순 없다. 비극에 잠식되는 순간 모두가 수렁으로 끌려들어 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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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희도에게 911 테러는 몸으로 체감되는 비극이 아니다.
타인의 비극은 가까이 들여다보지 않는 한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이진은 비극의 중심에 있었지만 희도는 비극의 바깥에 있었다. 먼 타국의 비극을 머리로는 이해할지언정 중요한 건 당장의 현실과 사랑하는 이를 보고 싶은 마음이기에, 비극을 대하는 깊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비극을 직접 겪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저 언젠간 잊힐 타인의 일일 뿐이다. 희도가 머리로는 모든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결국 헤어짐을 준비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타인의 비극을 '머리로는' 이해하기 때문에.
묻고 싶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진심으로 아파하고 죽을 것 같이 슬퍼하며, 내가 웃는 것조차 사치라고 느껴져 불행 속으로 기어들어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혹은 더 가까운 한국에서 일어난 숱한 비극적 사건들을, 내가 겪은 일처럼 아파하고 힘들어하며 어두운 시간을 보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어둠 때문에 내 행복을 더 힘들게 느낀 자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지금껏 일어난 모든 비극을 내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는 자들은 몇이나 될까.
타인의 슬픔, 비극을 내 것처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도 위선이다. 오히려 그 거리감을 대놓고 말하는 게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이진이 사회부 기자가 되면서 직접적인 대사와 사건으로 언급한 모든 것들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상 모든 비극에도 생은 이어지며, 비극과 동시에 누군가는 완벽한 희극 속에 있다. 희극 속에 있는 이가 비극 속에 있는 이를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그를 탓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이 우선이니까. 그렇게 비극과 희극은 늘 공존하고, 우리가 비극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예의는 기억하는 것이다. 또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사실 그거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 비극을 이해해 달라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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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선배 기자가 말했듯 사건을 사건으로 대하지 못한 이진은 끝내 비극에 잠식됐다.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의 끝없는 고통에, 자신의 비극으로 책임감을 다했다.
사실 이진은 비극을 나누는 사람이 아니다. 아니, 나눠본 적 없다고 보는 게 마땅하다. 쭉 희극이 가득한 인생 속에서 감당 가능 한 비극만 겪었을 이진. 그러다 급격하게 다가온 비극은, 비극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 와중에 이진이 선택한 건 비극을 받아들이는 거였다. 비극을 받아들이고 앞서 말했듯 행복을 내려놓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희도가 등장했다. 희도는 비극을 희극으로 덮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면 이진은 끝내 비극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곁에는 늘 희도가 있었으니까.
끊임없이 비극을 함께 나누자 말하는 희도와 비극을 나누기보다는 희극으로 덮어버리는 걸 선택한 이진.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진은 비극을 모른 척하기로 한 거다.
이 둘의 끝은 예정돼 있었던 거나 다름없다. 비극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비극을 나누고자 하는 과정 자체가 비극이다. 근본적으로 힘든 일을 입에 담지 않음으로써 이겨내는 성향일 텐데, 그런 사람은 힘든 걸 말함과 동시에 그 감정이 구체화되어 스스로를 괴롭힌다.
희도와 이진은 서로 달랐기에 끌렸다. 비극을 받아들이는 이진에게, 비극을 희극으로 덮어버리는 희도의 존재가 얼마나 빛났을까. 꼭 비극을 이겨낼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희도가 얼마나 힘이 됐을까. 하지만 이진의 성향은 희도와 근본적으로 달랐고, 다르기 때문에 헤어져야만 했다.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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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 이진의 연애사를 알 순 없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제야 이진이 홀로 비극을 극복하는 방법을 익혔을 거라는 거다. 찬란하고 빛났던 희도와의 연애를 초석삼아 쭉쭉 나아갔을 거다. 사랑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비극을 모른 척 덮어버리는 것이 아닌, 온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이겨냈을 거다. 후회했겠지. 정말 아팠겠지. 하지만 이진에겐 꼭 필요한 과정이다.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비극을 이겨내는 것. 건강하게 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
희도는 이진과 달리 자신에게 의지하고, 사소한 비극도 나눌 줄 아는 사람과 연애하고 결혼했을 거다. 비극을 나누고 희극을 더해가며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과 사랑했겠지. 이진과의 연애를 교본 삼아,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경험을 성숙하게 표현했을 거다. 어쩌면 비극 나누기를 강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뭐 어떤 식으로든 더 멋진 사랑을 했을 거다.
그래서 두 사람은 헤어지는 게 맞다. 아니, 너무 잘 헤어졌다. 이 세상 누구보다 나를 응원했던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 딱 그 정도의 거리에서, 각자의 꿈을 이뤄내는 것. 솔직히 나는, 두 사람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 두 사람이 했던 게 사랑이었다면 어른이 된 두 사람이 나눈 건 추억이자 진심, 과거의 나를 향한 애정이었으니까.
희도가 그랬듯 40대의 이진도 행복하길 바란다. 추측하자면 혼자 힘으로 비극을 이겨내는 법을 배운 이진이,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누군가를 품어주지 않았을까. 온전히 자신의 비극을 나누진 못해도 조금은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서로에게 딱 맞는 선을 가진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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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을 함께 보낸 모든 이들이, 그 순간의 여름을 기억하고 새로운 여름을 써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언정, 내게 스물다섯스물하나는 꽉 닫힌 해피엔딩이다. 두 사람은 완벽한 사랑을 했고 건강한 이별을 했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정상에 올랐다. 추억할 거리가 있고 인생의 친구를 얻었다. 이 어찌 해피엔딩이 아닐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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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드라마로 이 사달이 난 건 과한 분석의 폐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유튜브 켤 때마다 온갖 뇌피셜이 난무해서 피곤할 지경이었는데 정작 가볍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을 일차원적으로 받아들이니 예상 외의 이슈가 생겼다.
물론 의도된 연출을 찾아내고 그걸로 작가와 감독의 메시지를 궁예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그게 모두 뇌피셜이라는 거다. 제작진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시청자가 스토리를 들었다 놨다 난리도 아니었으니까. 뭔가 시청자의 반응이 매번 이런 식이면 글 쓰는 거 자체가 무서워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 와중에 시청자가 마음대로 달아올랐다가 차갑게 식으며 공격적으로 변하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좀 충격적이다. 마음껏 궁예를 하다가 그 궁예가 틀렸다고 하니 배신감이 든단다. 마음대로 연출을 뜯고 분석하다가 거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니 연출이 실패했다고 한다. 심지어 공식 기사들까지 드라마의 끝이 안 좋다고 말하는데... 아무리 봐도 물타기가 심한 듯.
흠... 생각이 많아진다.
정작 희도와 이진은 행복한 인생을 살며 희극을 누리는데 시청자는 비극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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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마지막 승완이 예능 피디인 거 같은데, 조감독이라 불리는 상황에 대해서. 드라마 타이즈가 아닌 이상 예능 프로그램에는 '조감독'이 없다. 감독이 있다면 카메라 감독, 조명 감독, 거치 감독, VJ 감독 외... 돌림판 챙기는 건 작가 혹은 PD임! (연차 생각하면 막내는 아니겠지만) 뜬금없이 예능판 씬에 "조감독님"이라는 호칭이 나와서 와장창 깨긴 했음 *_*! 직업병이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