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의 실수가 엄청난 자아성찰로
사람에게 큰 정이 없다고 말했다.
사람을 믿는 건 피곤한 일이며 가족 외 모든 사람은 무조건 멀어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 세상에 존경할 만한 상사는 없으며 옳은 상사도 없다고 말했다. 모두 문제가 생기면 제 밥그릇 챙기는 데만 급급하다고 했다. 책임을 지는 이가 없으니 이 바닥엔 희망이 없다고도 했다. 작가 일을 하면서 만난 많은 사람을 무책임하다고 생각했고, 엔터테인먼트에 있을 땐 그정도가 더 심해졌다. 콘텐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에겐 어떤 설명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내 의견이 가장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일하던 층의 모든 사람 중, 내가 가장 높은 연차였고 나이도 제일 많았으며 TV 경험도 유일했다. 어떻게 보면 그 경력이 나를 좀 먹는 독이 됐다.
인정받는 즐거움에 빠져 끝없이 날아다니다가 할 수있는 게 줄어드니 무력해졌다. 나를 위해 일한다는 자위도 한 두 번, 현실의 벽은 나를 엔터테인먼트에서 튕겨 나가게 했다. 그 무렵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회사를 위한답시고 쓴소리해대는 쌈닭일수록 ‘변화없음’에 치명적으로 녹다운 된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필요한 변화도 당장 눈에 띄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혼자 초조했고 혼자 전쟁터에 있었다. 모든 일에 환멸이 생겼고 그 무렵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었다.
몇 달 동안 일을 쉬었고, 마음이 안정되니 슬금슬금 인정 욕구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누군가가 내 인정 욕구를 낚아챘다. 과분할 정도의 칭찬과 믿음, 인정을 받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제안에 응했고 자신감도 있었다. 근데 이번엔 그 인정 욕구가 독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내가 상위 경력자였던 세상은 너무나도 작은 세상이었다. 사람은 많고 전문가는 많으며 난다 긴다 하는 능력자들은 이 세상에 넘쳐났다. 내가 있던 곳이 우물이었다는 깨달음은 오히려 인정 욕구를 폭발시켰다. 더 잘하고 싶다. 나를 인정해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우물 밖으로 꺼내줬으니 뭐라도 보여줘야 한다. 실수하고 싶지 않다. 이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도 잘하고 재미도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올라운더가 되고 싶다. 처음으로, 제대로 속하고 싶은 곳이 생기니 조바심이 났다. 새로 얻은 직함만큼 우물 밖의 세상이 정말 재밌었다.
생각해보면 날 낚아챈 누군가는 늘 말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내가 믿는 사람은 너 뿐이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책임은 내가 진다” 그 누군가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흔들리지 않고 함께 이야기했던 초심대로 쭉쭉 밀고 나가는 것. 그러나 갑자기 커진 내 세상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나를 믿어주는 단 한 명의 누군가. 그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얽혀있는 많은 이들. 내 성적표는 곧 누군가의 성적표와도 같았기에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으론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속으로 움츠러들면서 인정 욕구가 또 폭발해버렸다. 마치 내가 분열돼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중간 점을 찾는 과정에서 조심성이 늘어났다. 눈치를 보고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내 의견을 속에 묻고 남의 생각을 흡수했다. 그게나를 죽이는 줄도 모르고.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중간 점을 찾으라고 하진 않았는데, 나는 또 혼자 전쟁을 시작한 거였다.
‘싸우면 안 된다’ ‘좋게 좋게 풀자’ ‘기분 좋게 가자’ ‘저 사람에겐 장점이 있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감정의)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하는데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다가 중요한 걸 잃었다.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좋게 좋게 가고자 했던 마음은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하자는 거였는데, 왜 그 마음이 탁해져 버린 걸까.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정말 최악인데. 사실 그 누군가에게 나는,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건 제대로 내 능력을 발휘해서 최대 효율로 즐겁게 일하는 거였는데 왜 일을 내려놓고 ‘좋은’ 사람만 되려고 한 건가.
그 와중에 오늘 쥐구멍을 파고 싶은 실수를 했다.
전체 회의에 필요한 페이퍼의 치명적 오타를 발견하고 식은땀이 났다. 심지어 페이퍼를 만들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문제가 됐다. 나는 안일했다. 정신이 없었다는 건 변명이 안 됐다. 그건 내가 환경에 흔들렸다는 소리니까. 누군가에겐 사소한해프닝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큰 사건이었다. 끝을 모르고 차오르던 인정 욕구에 제대로 흠집이 생긴 기분이었다. 쥐구멍은 무슨 지구의 핵까지 뚫고 들어가고 싶었다.
사실 작가 언니들의 태도 중 내가 가장 혐오하던 것 중 하나는, 후배 작가를 믿고 2차 검열을 안 하는 행동이었는데 오늘 내가 한 행동이 바로 그 태도의 일환이었다. 친동생처럼 데리고 다니던 작가 후배에게2차 검열을 요구하던 나. 그리고 그게 익숙해져 버린 나. 실수 한 번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자기반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전쟁에서 패배했다. 가장 어렵다는 나와의 전쟁에서 내 멘탈은 박살이 났다.
멘탈이 박살 났다는 걸 깨닫자마자 또 전쟁이 시작됐다. ‘이걸로 멘탈이 나가면 어떡하니. 실수를 인정하고 개선하고 발전하면 되지. 작은 일에 매여 있지 마’라고 생각해봤자 몇 분을 못 버텼다. 내겐 작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스스로 화가 나 미칠 것 같으니, 사무실에 사람이 들어와 살갑게 말을 걸어도 웃지 못했다. (다시 생각하니 지구를 그냥 폭발시키고 싶다)나는 오늘, 그나마 ‘좋은 사람’이 되는 일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다. 박살 난 멘탈을 야무지게 붙이고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기위해서다. 과했던 인정 욕구를 내려놓고 좋은 사람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누군가가 나를 불렀던 그 마음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이제 3주 차. 오늘의 찌질한 순간을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찌질함의 역사는 꿈의 스토리에조미료가 되니까.
이 전쟁의 무기는 바로 나. 자고로 무기란 많이 써야 손에 익고 길이 든다. 무기를 칼이라 친다면 나무도 베어보고 쇠도 베어보고 사라ㅁ...은 말로 하면서 다양한 것을 베어봐야 할 텐데 아직도 나는 그 과정에 있다. 과정에 무너지면 될 것도 안 된다. 길들이면 될무기를 한 번 날이 나갔다고 버릴 순 없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 무기를 사용해주는 누군가가 무기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 이건 혼란했던 하루를 마감하며, 찌질한 나에게 하는 말이다. 부엉 부엉 씨부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