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의 첫사랑

by 흐를일별진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연애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마음이 통하는 기적을 바라지 않았을 뿐, 나는 누군가를 좋아할 때 생기는 심적 변화 자체를 즐겼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일상이 통째로 바뀐다는 걸 의미했다. 평범한 하루가 아주 특별하게 보이고, 늘 듣던 음악이 평소보다 더 감미롭게 느껴지는 것. 마음에 씌운 필터 하나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버리는 거다.

다만 나의 사랑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 마음을 전할 수 없다는 가슴 저릿한 감각에 가끔 숨이 턱턱 막히는 상실의 느낌이 더해지면, 나는 그 안에서 완벽한 낭만을 느꼈다.


내 인생의 온전한 첫사랑이자, 가장 가슴 절절했던 짝사랑의 기억은 내 나이 열여덟 살부터 시작됐다. 그 무렵의 나는 작은 지역 단체 활동에서 만난 오빠를 좋아하고 있었다. 진실게임을 통해 내 마음을 알게 된 친구는,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오빠와 나를 이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친구가 고마웠다. 내 사랑에 누군가의 도움이 보장된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포항에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하교하던 길, 나는 교문 앞에 서 있는 오빠를 발견했다.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내 짝사랑의 주인공. 나는 오빠에게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했다. 부끄러움에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던 그때,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오빠의 품에 뛰어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빠에게 안긴 사람은 내 사랑을 이어주겠다던 바로 그 친구였다.

친구는 오빠를 보며 방긋 웃었고, 오빠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목도리를 벗어 친구의 목에 둘러줬다. 다정한 모습의 두 사람이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내가 본 것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모든 상황을 아는 친구들은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몇몇은 이미 옆에서 그 친구를 욕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내게는 그 어떤 위안도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친구들도 내팽개치고 그대로 학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화장실에 혼자 남아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눈물 콧물 모든 감정을 짜내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황이 완벽하다 생각했다. 내가 주인공인 짝사랑 영화의 결말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던 거다. 친했던 친구에게 사랑을 빼앗기고, 둘의 다정한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는 설정. 얼마나 영화 같은가.

그래 친구야. 너는 행복해라. 나는 이제 너와 오빠를 보내주련다. 한없이 쿨 한 척 주인공의 사랑이란 이런 거라며, 나는 그날의 상처를 허세로 덮었다. (그 친구와는 ‘혼자’ 절교했다)





사실 그렇게 영화가 완벽했다면, 이후에도 꾸준히 짝사랑 영화를 시도했어야 했다. 마음이 통하는 걸 기대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사랑을 겁내지도 않는 것. 하지만 나에게 그 영화는 생각보다 아주 아팠었나 보다. 더는 내 마음에 짝사랑이라는 영화가 생기지 않았으니까.


학창 시절이 끝나고, 어느덧 성인이 된 나는 마음에 높은 벽을 쌓는 게 익숙해졌다. 의도적으로 어디에서도, 어떤 식으로도 확신 없는 감정이 커지지 않게 다잡았다. 혹시라도 그럴 낌새가 보이면 늘 최악을 상상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달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나는 늘 출발선 뒤에 서 있었다. 내가 피했고, 내가 두려워했던 감정이었기 때문에 놓친 사랑을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그러니 가슴 절절한 상실의 시대는 전편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겁쟁이 어른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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