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moment of life
2015년, 봄의 제주.
월정리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텝으로 일할 때였다. 모처럼 쉬는 날을 맞아, 친구와 나는 오일장 구경을 위해 제주시로 향했다. 오일장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각자의 가족들에게 엄선한 귤도 택배로 보냈다. 시장 곳곳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우리는 702번 마지막 버스를 타고 월정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버스가 정류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미 해가 진 어두컴컴한 정류장 앞은 몇 개의 가로등만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빛 사이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선명하게 보였다. 친구와 나는 일단 우산 없이 내려 급한 대로 정류장에 멈춰 섰다.
옷을 가다듬고 걸을 준비를 하던 그때, 그녀가 가방에서 아주 작은 우산을 꺼냈다. 탁월한 준비성이었다. 함께 쓰고 가자며, 친구는 우산을 펼쳤고 나는 자연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조금 당황스러운 행동이긴 한데, 그 순간의 나는 <맨발로 빗속을 걷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를 맞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는 맨발로 걷는 걸 정말 좋아했다. 발에 닿는 땅의 감촉과 함께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즐겼다. 그래서 벗을 수 있으면 벗거나, 그럴 수 없으면 늘 신발을 벗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나 보통은 이런 나의 충동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기 때문에,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나름 내 충동을 잘 제어하곤 했었다. 내 감성은 소중하니까.
그런데 그날은 아마도 친구와 나의 관계를 믿었던 것 같다. 이 친구라면 내 행동을 막는 게 아니라, 재밌어하거나 그런 나 자체를 좋아해 줄 거란 신뢰가 있었다. 최소한 나의 낭만이 깨지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던 거다.
실제로 그녀는 갑자기 맨발이 된 나를 보며 즐겁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신발도 벗어 들었다. 순식간에 우리 두 사람은 맨발이 됐다.
하나의 우산을 나눠 쓴 우리의 어깨에는 온기가 가득했고, 비가 고인 땅을 밟고 선 두 발은 시원했다. 그 상황이 낭만적이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서로의 모습이 재밌기도 해서, 우리는 그날 참 많이 웃었다.
그때의 기억은, 나에게 감성이 맞는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했다. “위험해!” “그런 행동 하지 마.”가 아니라 “하고 싶으면 해.” “근데 혼자 하지 말고 같이 하자!”라고 말해줄 수 있는 친구.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 조금 특별하게 세상을 느끼는 것뿐이라 말해주는 인연. (물론 내가 마냥 평범하지 않다는 건 인정한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소중한 추억을 나눠 갖게 됐고, 나는 종종 그녀를 떠올리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다만, 나는 전공이 잠수라, 종종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못난 친구라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