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생긴 일
기분 좋은 날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모처럼 창밖이 밝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나가지 않아도 하늘의 높이를 예상할 수 있었다. 분명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명하겠지. 예상은 적중했다. 폴 오스터의 책 한 권을 들고 집 밖을 나서자마자 기분 좋은 향기를 맡았다. 햇살을 조명 삼아 책을 읽으며 정류장으로 향했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도착한 버스마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그때까지는.
버스가 급정거했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옆 차선 흰색 차량과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저하되고 있는 걸까. 기사님의 욕설이 음악을 뚫고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제대로 표출되지 못했다. 옆 차선 차량이 멈춰서는 듯하더니 버스를 앞질러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녕 운전하면서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걸까 생각하며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버스가 합정역에 멈춰 섰다. 뒷문이 열리고 한 차례 사람들이 내렸다. 앞쪽에 버스가 밀려있던 터라 버스는 문을 닫고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뒤쪽에 앉아있던 커플 중 남자분이 말했다.
“죄송한데 차 문 좀 열어주실 수 있나요.”
내릴 타이밍을 놓쳤나보다 생각했다. 커플은 뒷문 앞에 서서 기사석을 바라보았다. 웬걸.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 뒤 문이 열렸고 커플이 내렸다. 다시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그러나 버스는 얼마 가지 않고 다시 멈춰 섰다. 신호에 걸린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앞문이 열리더니 기사님이 그 너머에 있는 커플에게 날 선 분노를 쏟아냈다.
“이게 자가용이야? 어디서 문을 열어달라 마라야”
“저희가 뭘 잘못했나요? 문 열어달라고 한 게 그렇게 잘 못 됐나요?”
“어디서 사람을 그렇게 쳐다봐 이 새끼가. 사람들 내릴 때 안 내리고 뭐 했어 시발”
기사님의 분노가 길을 잃었다. 가장 만만한 사람에게. 당장 자신에게 보복하지 못할 버스 밖의 상대에게. 기사님의 분노가 표출되는 와중, 앞쪽에 앉은 어르신 한 분이 말씀하셨다.
“이제 그만 가시죠”
분노의 방향이 바뀌었다. 앞문이 닫히자마자 그의 욕설은 어르신에게 향했다. 들릴 듯 말 듯. 버스 내부의 분위기를 의식한 듯 작아지는 목소리로. 그 와중에 때려 꽂힌 말은 “집에나 있지.“
이야, 노인 무임승차 이슈까지 건드려주다니.
생각했다. 그의 오늘 하루는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될까. 집에 가기 전 누군가와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오늘의 ‘재수 없음’을 토로할까. 집에 가까운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방향 잃은 분노를 쏟아낼까. 모든 이들이 듣는 곳에서 ‘강한 척’ 욕을 쏟아내며 스스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기 모습이 만족스러웠을까. 자신의 논리 없음에 부끄러움은 조금도 없었을까. 웃음이 새어 나올 뻔 했다. 인간이란 족속이 참으로 우스워서. 그 와중에 나도 인간이니 다를 게 없겠지 싶어서.
다행히 내 기분은 나빠지지 않았다. 재밌는 소재거리가 생겼네 정도일 뿐. 여전히 책은 재밌었고 멈춤 없이 들려오던 음악도 계속해서 좋았다. 내게 씌워진 자체 필터가 상황을 제삼자로서 관망할 수 있게 도왔다. 다만 글을 쓰며 마음을 다잡긴 했다.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어떠한 형태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심호흡을 통해 한 발짝 떨어진 상태에서 반응하자고. 절대 매몰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