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안 한 38세
87년생.
만 나이가 공식 나이로 도입되었으니 8월생인 나는 아직 서른 일곱살이다. 그러나 하반기엔 서른 여덟이 된다는 건 좀 헷갈릴 수 있으니 누군가 내 나이를 물어본다면 으레 서른 여덟살이 되었다고 말한다.
서른 여덟살. 옛날이었다면 벌써 애가 몇이고 가족을 꾸리고 내 명의의 집 하나 쯤 있고 사회에서 인정 받는 위치에 있을 거라는 둥의 이야기를 듣는 나이.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냥 프리랜서 작가일을 오랫동안 해 온, 한 집안의 미혼 첫째 딸일 뿐이다. 그렇다. 타이틀이 마땅찮다.
그동안 나는 정신승리를 하며 아주 잘 지냈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야 불안도가 이렇게까지 높아졌냐 묻는다면 가족의 팩트 폭행 때문이라 답한다.
나는 내가 우리 집 가장이라 생각한다 누나
동생의 삶은 정석 그 자체였다. 나와는 완전히 달랐다. 공부를 무척이나 잘 했다. 소위말해 천재라고 할 정도로 다방면에 능했다. 공부, 그림, 글, 언어, 심지어는 게임까지.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명문대에 들어갔다. 지금은 본인의 위치에서 정말 잘 해주고 있고.
나는 단 한 번도 동생을 질투하거나 동생에게 자격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랬다고 믿었다. 그런데 서른이 넘은 동생의 저 한 마디에 무언가가 내 머리를 강하게 쳤다.
동생은 말했다. 당장 집에 일이 생겨서 큰 돈이 필요할 때 움직여야 하는 건 나. 자신이 마지막 방어선이라 생각한단다.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내 입 하나에 풀칠 하기에도 급급했다. 처음으로 삶을 돌아봤다. 처음으로 내가 잘못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모르는 남들이 한 말이라면 그냥 웃고 넘겼을 텐데 가족의 말이라 타격감이 셌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니까.
나는 물었다. "네가 가장이라는 건 다르게 말하면 가족이 짐일 수도 있다는 건데, 내가 어떻게 하면 네 마음을 조금 덜어줄 수 있겠노" 동생이 말했다. "결혼해라." 나는 다시 물었다. "내가 결혼하면 네 마음이 편해지나" 동생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누나가 결혼하면 누나 힘든 일은 남편이 같이 나눠줄 수 있겠지." 말인즉슨 내가 결혼을 해야 내 가정이 나의 또 다른 울타리가 되면서, 자신이 나를 덜 신경쓸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거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동생은 늘 당연하다는 듯 올케의 일에 나섰다. 올케의 집안 일에 관여했고 올케 또한 우리 집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본인의 일처럼 대했다. 동생의 결혼관에 의하면 결혼은 곧 새로운 울타리였다. 그러니 내가 결혼을 해야 동생의 부담을 나눌 사람이 생기는 거였다.
다만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그 맞는 말이, 지나칠 만큼 현실적이어서 결혼하지 않은 내가 너무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는 거였다. 내 나름대로 집에 일이 있을 때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엄마 아빠를 챙겼는데. 그 모든 건 내가 결혼하지 않아서 가능하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모두가 어느정도 안정을 찾으니 내가 미혼인 게 문제가 되다니.
나는 비혼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껏 결혼을 하지 못한 건 마땅히 선행되어야 할 연애라는 것에 큰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종종 사람을 만나긴 했지만, 사랑과 일 그리고 가족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라면 나는 늘 일과 가족이었다. 그러니 연애할 시간 보단 일을 할 시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누군가는 말 할 거다. 모든 건 핑계라고.
동생도 말했다. "결혼을 하고 싶으면, 누나가 쓰는 시간의 80%를 남자 만나는 데 써야 한다" 나는 반박했다. 내 시간의 80%를 남자에게 쓰면 일은 어떻게 하나. 프리랜서의 시간은 곧 돈인데 그 돈을 결혼 할 지, 안 할 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투자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글을 쓰다보니 확실한 어폐는 있다. 세상 모든 남녀 관계는 불확실성에서 시작하니까)
핑계를 대본다. 나는 늘 사랑이 어려웠다. 많은 이들이 가볍게 만나봐라, 만나면 좋아질 수 있으니 여러 번 봐라, 싫어도 일단 나가봐라 이야기를 하는데 난 그 모든 게 안 됐다. 가볍게 누군가를 만날 거면 왜 만나? 그 시간에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한 편 더 쓰지. 만나면 좋아질 수 있다고? 처음에 싫은 건 계속 싫다. 다만 그 싫은 걸 이해할 만큼의 장점을 찾아내는 과정이 여러 번 보는 건데 그렇게까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가? 싫은 데는 싫은 이유가 있는데, 싫어도 나가보라는 건 너무 주관적인 말이 아닌가.
자, 줄줄이 늘어놨는데 이게 바로 내가 결혼을 못한 이유이자 가장 큰 문제다. 내 나이쯤 되면 괜찮은 사람은 없고 어딘가 하자(?)가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내게도 하자가 있는가. 내 하자는 무엇인가. 이 나이 먹도록 혼자라는 게 하자일까. 어릴 때야 결혼을 못하는 사람은 다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고보니 모든 게 의지대로 되는 건 아니더라. 문제라는 것 자체가 사실 주관적인 부분이라 '하자'라는 말로 후려치기엔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든다.
결혼, 때가 되면 꼭 해야지.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하면서 불안함을 숨겼다.
자신이 가장이라 생각한다는 동생, 내가 연애에 노력을 안 한다는 팩트, 결혼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경제적인 부분. 하자를 논한다면 나의 가장 큰 하자는 모아놓은 돈이 없다는 거다. 우습게도 남자를 만나야지!하는 노력보다 현실을 깨달아 버리니, 그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는 불안이 먼저 든다.
결혼, 해야지. 같이 위기를 넘기고 힘든 일을 극복할 수 있는 아주 든든한 사람을 만나서 같이 노력해야지. 근데 내가 너무 아무것도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또 우선순위는 남자가 아니다. 꿈이라는 이름아래 자유롭게 지내온 내 프리랜서 생활을 되돌아보며, 현실적으로 돈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게 뒤늦은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미혼인 누나는 가족의 짐이다. 특히 돈이 없는 미혼의 누나는 형제에겐 아주 큰 짐이다.
엄마아빠에게 미혼의 딸은 마음의 짐이다. 4박 5일간의 가족 여행이 끝날 때쯤 모두 각자의 집으로 헤어지던 길. 엄마가 말한 적 있다. "**이는 집에 가면 **이가 있는데, 니는 집에 가도 아무도 없는 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우리 딸 외로울까봐, 눈물이 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이해 된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가는데, 엄마나 아빠가 혼자고 텅 빈 집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면 나 또한 가슴이 미어지니까. 어쩌면 엄마도 그런 마음으로 내 걱정을 하고 내 결혼을 바라는 거겠지.
우습다. 삼십대 중반만 해도 누군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큰 타격이 없었는데. 엄마아빠, 동생이 스치듯 이야기를 해도 이 정도로 타격을 입진 않았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진짜 늦어버린 때가 왔나보다. 내가 정말 나이를 먹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