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존 매거진 87년생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
불안하다. 정말 불안하다.
정신 승리로 긴 시간을 버텨왔지만 나이가 마흔에 가까워지니 어쩔 수 없나보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이대로 결혼이란 걸 할수나 있을까. 일에서 시작된 고민이 결혼, 가족, 이후의 삶까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답답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애초에 답이 없는 문제다. 대한민국 평균의 사례만 있을 뿐.
본업은 방송 작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능 작가다. (방송 작가는 크게 라디오, 교양, 예능의 세가지 분야로 나뉘는데 각 분야별 작가의 롤이나 업무에서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예능만 한 사람들은 자신을 예능 작가라 칭하긴 한다. 나도 그렇고)
나는 25년 기준 15년차가 된 작가다. 생방송 서바이벌 쇼로 시작해서 커플 매칭 프로그램, 장르를 바꿔 라디오 오디션 프로그램, 다시 예능으로 돌아와 여행, 재연, 토크, 관찰 프로그램 등등 온갖 장르를 섭렵했다. 흔히 레귤러라 칭하는 1년 이상의 프로그램에 간 적은 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장르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일이 끝났으므로)
10년차가 되던 해 한 엔터테인먼트 케이블 채널인 큐브 TV에서 첫 메인을 달았다. 작가 두 명의 작은 프로그램이었지만 나름 팬덤 내에서는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열심히 했다. (팬덤 관리, 사진 전공을 살려 스틸 촬영 및 보정까지 도맡았다. 팬들이 원하는 걸 찾으려고 애썼다)
노력을 인정받은 건지, 그게 인연이 되어 프리랜서 생활을 잠시 접고 큐브 엔터테인먼트 영상팀에 계약직 작가로 들어갔다. 모든 엔터를 통틀어 큐브에서 시작된 첫번째 사례였다. 외부 작가를 내부 작가로 고용해 돌리는 것. 그 안에서 비투비, 펜타곤, 조권, 아이들, 라잇썸, 나인우 등 많은 아티스트들의 기획형 예능 자컨을 담당했다. 콘텐츠 기획안도 공장처럼 찍어냈다. 팬들이 원하는 걸 맞추려면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기획을 내보내야 했다. (물론 예산, 인력 풀 때문에 우리 뜻대로 안 된 게 더 많았지만)
많이 배웠다. 엔터테인먼트의 방향성과 한계, 내부 직원들과 아티스트의 관계, 콘텐츠라는 게 도장 찍듯이 나올 순 없다는 것. (단적인 예 하나. 보통의 예능은 피부 보정에 그리 큰 공을 들이지 않는다. 포인트는 재미이므로. 그러나 엔터의 콘텐츠는 피부를 미는데(민다=보정한다) 엄청난 공을 들이고 긴 시간을 쓴다. 콘텐츠의 내용보다 아티스트를 예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게 최우선이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기획에 한계가 생긴다. 무조건 애들이 '예뻐' 보여야 하니까. 당연하다. 그러나 어느 부분에 시간을 들이느냐에 따라 콘텐츠 업로드 속도는 느려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개인적으로 나와 후배의 자컨 기획 핵심은 영상을 보고 외부 작가, 피디들이 아티스트를 섭외하는 게 목표였다. 우리야말로 외부 제작진들이 아티스트에게 뭘 원하는 지 알고 있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일 하는 내내 힘든 점 보다 즐거운 점이 더 많았지만, 내부의 문제들 때문에 계약기간이 끝난 후 연장하지 않았다.
다행히 큐브 엔터의 인맥이 확장되어 CJ 계열의 또 다른 엔터에서 프리랜서 영상팀 작가 일을 지금까지도 외주 용역의 형태로 하고 있다.
그 사이 BL 드라마(=BL이란, 보이즈 러브)를 만드는 제작사 겸 CP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일 했다. 소규모의 회사였지만 나름 직함은 그럴싸해서 제작 관리 겸 방송 작가일을 같이 했다. 여기서도 전공을 살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스냅 촬영을 병행하며 SNS용 홍보 자료를 모았다. CP로(=CP란, 비엘 드라마에서 커플로 출연한 이들을 통칭) 활동하는 배우들의 콘텐츠를 기획, 구성하고 편집을 컨트롤 했다. 여기서도 많이 배웠다. 드라마 시장에 대해 알았고 TV 작가를 할 때엔 상상도 못했던 초 저예산의 제작비로 나름 괜찮은 조회수의 콘텐츠를 뽑기도 했다. 제작비를 따지는 건 일종의 핑계와 같다는 걸 알았다. 하면 다 되더라. 물론 그 과정에선 나를 잘 이끌어준 친구이자 상사의 역할도 컸다.
그러나 안정적일 줄 알았던 회사는 곧 불안해졌다. 나는 1년 반만에 지극히 현실적인 이슈로 퇴사를 했다. 안정적일 거라 믿었던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충격적이었다.
안정적인 건 없다.
그러니 내가 가장 잘 하는 걸 자신 있게 하자라는 생각으로 다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1) CJ 계열 엔터테인먼트 영상팀, 프리랜서 작가
2) 숏폼 드라마 & 숏 예능 작가팀 페이지터너스 대표 작가
써놓고 보니 그럴싸 하다. 많은 시행 착오를 겪고 내 재능을 살려 뭔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가 불안한 이유는 수익이다. 어쩔 수 없이 수익이 일정하지 않다. 그 와중에 유튜브는 취미였고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그걸 그냥 썩히기 아쉬워서) 마플샵도 비슷한 취지에서 시작했다보니 불안에 불안을 더했다. 그리고 이제야 알게 된 건 바로 그 태도가 문제라는 거다.
현실을 말해보자면,
엔터테인먼트 영상팀 작가의 경우 (비화이지만, 보통 많은 엔터테인먼트의 콘텐츠 제작비는 회사와 아티스트가 일정 비율로 나눠 부담한다) 큰 기획이 아닌 이상 제작비 절감의 차원에서 인 하우스 직원으로만 기획/촬영을 하는 게 이득이다. 그러나 대중의 문화적 관심도와 역량이 높아지면서 콘텐츠에 대한 기대가 같이 올라가다보니 부득이하게 작가가 필요한 경우가 생기는데, 이 경우에만 외주 용역으로 의뢰가 들어오다 보니 일이 꾸준하지 않다. 아티스트들의 컴백, 활동 마무리, 사이사이 들어가는 예능형 자컨 외에는 의뢰 자체가 잘 없다. 그러니 돈이 될 때는 기대 이상으로 되고 안 될 때는 0원을 찍는다.
숏폼 드라마 & 숏 예능의 경우 (현재 숏폼 업계 대본이 난항인 이유는 중장편의 호흡을 익숙하지 않은 분 단위의 호흡으로 끊는 과정에서 주관을 놓지 못하고 예술을 하려는 경향이 높아서) 아직 과도기에 있다. 아이디어는 많지만 그걸 대본화 하는 과정에서 많은 작가들과 연출자들이 난항을 겪는다. 가장 쉬운 건 기존의 IP를 활용하여 각색하는 건데, 그 자체가 중장편이기 때문에 각색이 쉽지 않다. 선택과 집중의 이슈에서 허우적 거릴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생각했을 때 필요한 건 예능적 구조라고 판단했다. 숏폼의 핵심은 구성. 쌈마이의 대사빨. 작가로서는 내려놓기 쉽지 않은 디테일을 전부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예능 작가가 적합하다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기회가 닿아 뭔가를 해보겠다는 요량으로 페이지터너스라는 개인 사업자를 내고 후배 작가 한 명을 영입했다. 결과적으로는 나름 큰 플랫폼에 납품하는 숏 드라마와 예능을 계약해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 마저도 지독한 현실이 있다면 한 달에 한 편씩 공장처럼 찍어내지 않는 이상 소요시간 대비 수익이 높지는 않다. 매달 안정적으로 꽂히는 금액이 아니라는 거다.
두 가지 일의 가장 큰 허점은 타인, 클라이언트에게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불안해진다. 단 한순간도 일을 함에 있어 꾀를 부리거나 대충 한 적은 없다. 그게 나의 장점이자 사람들이 나를 다시 불러주는 핵심 이유이기도 하니까. 작가라고 하여 단순히 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소품, 촬영, 아티스트 관리 등 전반적인 부분의 그림을 그리는 것.
그래, 나도 그런 내가 좋았다. 그런데 좋은 것과 결과는 다르더라. 나를 찾는 사람은 꾸준히 찾아주지만, 내가 상황에 안주하면서 나를 찾는 이들의 인원이 점점 한정적으로 변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은 완벽한 정신 승리와 합리화, 정당화로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누구든 이런 나를 알아줄 거라 생각했다. 아! 이 얼마나 비겁하고 안일한 생각인가. 남과 나를 비교할 생각은 없었지만, 누군가는 자신을 끊임없이 PR하며 일감을 따내고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는 그 과정에서 어떠한 것을 했는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한 게 없다. 가만히 해야 할 일을 하며, 바라고 꿈꾸기만 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