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 그대로
최근 다시 글을 써볼까, 생각하며 제일 먼저 했던 게 지난 일기장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기장에 쓰인 초기 기록이다. 아마도 그 때의 나는 전쟁 같은 12월을 보냈던 듯!
2023.12.01
딱히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좋아하는 감정을 깨닫는 게 예전만큼 설레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조심성이 늘어 그런 건지. 애써 부정하던 마음이 확실해진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
이상한 애다.
단점을 찾아내고 나와의 차이를 아무리 강조해도, 그게 아무렇지 않아진다. 그럴 수 있지, 받아들이게 된다. 거짓말처럼 설레지 않는데 거짓말처럼 스며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래서 안 돼. 마음을 접어야 해 생각하면, 어김없이 그다음 날엔 결심이 깨져버린다.
지난밤, 새벽까지 둘이서 이야기했다.
그 시간이 나는, 퍽이나 좋았나 보다. 그 애가 하는 말이 온 마음에 와닿는다. 곱씹어 생각하게 된다. 안아주고 싶어진다. 그냥, 곁에 있어 주고 싶어진다. 그가 마음껏 할 일을 하고 돌아와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 주는, 그런 평안이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애의 약한 소리를 듣고 싶어진다.
반대로, 나도 그에게 약한 소리를 하고 싶어진다. 그가 물은 적도 없는데 마음을 말하고 싶어진다. 내가 왜 서운한지 뭐가 속상한지 그에게는 전부 다 말하고 싶어진다. 그 애가 그랬다. 살아온 모습을 바꾸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면, 그땐 결혼을 생각할 것 같다고. 먼 미래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그 말이 유독 와닿았던 건, 내 모습이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치해지고, 바보 같아지고, 뚝딱거리게 되고. 나는 그런 내가 어색해서 거리를 뒀다가 다시 그를 기다렸다가, 혼자 어쩔 줄 모르곤 했다.
사실, 처음부터 신경이 쓰였다. 그가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을 때, 어쩌면 그때 시작됐을지도 모르겠다. 어지간하면 곁을 주지 않는 내가 그에게만은 빠른 속도로 곁을 내어줬던 것도, 본능적인 호감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며, 그 애에게 연인이 생기길 바랐다. 그렇게 하면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어, 이 마음을 억지로 접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무리 부정해도 안 된다. 어떻게 애를 써도 마음이 명확해진다. 좋아하고 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머지않아 결단을 내려야겠지.
2023.12.
왜지. 진짜 왜?
이해가 안 된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평소의 나라면 거슬리는 것 천지인데, 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될까. 밀어내려 아무리 애를 써도 왜, 또다시 곁을 내어주고 있는 걸까.
어젯밤엔 악몽을 꾸다 깼고, 거짓말처럼 그에게서 톡이 와 있었고, 나는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안도하고 잠들었다. 지금의 내게 그가 필요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근데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그의 곁에 친구로 머무르기엔, 자꾸 욕심을 내게 돼. 왜 그 아이와 엮이는 일은, 무엇하나 내 의지대로 되는 게 없을까. 진짜 지랄 맞네.
2023.12.
마음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미친년 널 뛰듯 오락가락한다.
좋아하는데 좋아하고 싶지 않다. 그를 좋아하는 내게 화가 난다. 그와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를 좋아해야 할 이유보다 멀어져야 할 이유가 더 많아지는데, 뭐 하나 어쩌지 못한다.
그의 말에 상처받는다. 악의 없는 그의 말에 자꾸만 상처받는다. 원래의 나였다면 그냥 멀어졌을 텐데, 왜 멀어지지도 못하는 걸까. 이미 시작된 마음 따위 무시해버리면 그뿐인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도대체 그를 얼마나 좋아하길래,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이길래.
그를 친구로 대하는 게 힘들어진다. 나는 남자인 친구가 필요 없는데, 그와 시간을 보냈던 모든 이유는 그 애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는데. 그의 다정함이, 그가 모든 여자에게 해왔을, 착각하는 사람이 잘못이라던 그 평범한 다정함이, 내겐 너무 끔찍한 독이다. 착각하지 않으려고, 친구로서 그의 곁에 머무르려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깎아내려야 하니까.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상처입혀야 하니까.
누가 보면 세기의 사랑을 했다. 알아주지도 않는, 혼자만의 사랑. 그걸 우리는 짝사랑이라 부른다. 물론 짝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고 기대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의미는 없다. 착각한 것도, 흔들린 것도 나니까. 남아있는 건,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과 그에 반해 명확해진 방향이다.
사실, 예전에 이 마음이 두려웠던 이유는, 남아있는 마음이 새로운 사랑을 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단 한 번도 무언가를 끝내지 않고 새로운 걸 시작해 본 적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런 부분에 있어 조금은 유연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를 좋아하긴 하지만, 기대를 하지 않으니 갈 곳을 잃은 마음이 허공에 떠 있다. 내가 붙잡지 않는 한, 아마 그 마음이 다시 나를 채우는 일은 없겠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더는 내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는 거다. 굳이 뼛 속 깊은 곳까지 그를 지우지 않아도,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있어도, 앞으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젠 좋은 사람에게 명확한 사랑을 받고 싶다.
자연스럽다. 일이 바쁜 그와 만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이대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떠 있던 마음이 어딘가에 정착하게 되지 않을까. 그럼 그때야 비로소, 이 지랄 맞은 짝사랑을 완전히 끝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