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삼림

by 흐를일별진



스물한 살의 여름.

한 친구가 영화 중경삼림을 이야기하며, 내가 그 영화 속의 여주인공을 닮았다고 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안경 너머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내 모습이 섹시해 보인다는 말도 덧붙였다.


짧은 커트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중성적인 캐릭터에 촌스럽기까지 했던 나는 도무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만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마시면서.





며칠 후 영화 중경삼림을 찾아봤다. 도대체 그 여주인공이 어떻게 생겼나 싶어서. 그러나 1시간 30분가량의 러닝 타임 동안에도 나는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 속의 왕페이는 너무나도 당당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통통 튀는 성격이 세련된 외모에 어우러져 그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나는 왕페이가 아니었다. 굳이 닮은 점을 찾자면 커트 머리와 안경이라는 외형적인 스타일뿐, 그 외에는 도무지 닮은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나는 그를 닮았다기에 전혀 예쁘지 않았다.



우습게도 몇 달 뒤, 나는 그 말을 했던 친구와 사귀는 사이가 됐다. 그 친구는 내 커트 머리를 좋아했고, 나는 조금씩 내 스타일에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서 그 친구와 헤어진 후에도 한동안 커트 머리를 유지했다. 처음엔 미련이었고, 나중엔 그 모습이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믿었다. 한때의 누군가에게 과분할 만큼 큰 사랑을 받았던 스타일이니까.





그리고 지금, 옛 기억이 추억으로 남게 된 서른셋.

한 친구와 옛날 영화 다시 보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중경삼림이 떠올랐다. 그날은 조금 습했고, 그 날씨는 중경삼림을 보기에 완벽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곧바로 대화를 멈추고 행동에 옮겼다.


모든 게 영화와 최적화돼서 그랬을까, 다시 본 중경삼림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그 시절에는 재미와 별개로 “얘네 왜 이래?”하는 의아함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든 게 이해되더라. 캐릭터의 마음이 와 닿았고 그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나고 두 번째 이야기인 양조위와 왕페이의 사랑이 시작되는데,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 속의 왕페이가 낯설지 않았다. 그의 뭔가가 계속 나를 거슬리게 했다. 도대체 이 감정이 뭘까 고민하며 영화에 집중하던 순간, 나는 왕페이의 안경을 보면서 문득 그의 말을 떠올렸다.


“선배는 안경 너머로 딴 데 볼 때가 되게 섹시한 거 같아요.”


왕페이는 안경을 쓴 채로, 살짝 숙인 고개 너머 주변을 응시했다. 안경을 올리거나 내리지 않고, 습관처럼 눈을 치켜뜬 채 안경 너머로 세상을 봤다.

나는 그제야 과거의 연인이 했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말했던 닮음의 핵심은 습관이었다. 아주 사소하지만, 반복적으로 보여주던 왕페이의 습관이 나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던 거다. 신기하게도 그 깨달음이 나를 완전히 과거에서 분리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속이 후련했다.





어차피 내 과거의 연애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에게 환상을 갖고 있었고, 애석하게도 그 환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깨지기만 했을 거다. 어쩌면 그의 마음은 진작부터 허공을 떠돌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부터 그의 환상에 부합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던 가을에도, 긴 연애가 끝나던 봄에도, 나는 늘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모든 것은 그저 그 혼자만의 환상이었을 뿐, 나는 단 한 번도 영화 속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다.


지금의 나는 안경을 쓰지 않고, 커트 머리도 아니다. 예전과는 많은 게 달라졌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첫 연애에 대해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왜 나를 좋아했을까, 우리는 왜 헤어진 걸까. 매번 시작되는 마음에 제동을 걸었던 물음의 해답을 찾기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해답이 나왔다. 한 편의 영화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미련과 호기심을 지워낸 거다.

비로소 과거는 완벽한 추억이 됐고, 나는 제대로 앞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아. 영화를 다시 보게 돼서 정말 다행이다. 돌고 돌아 드디어, 나의 첫 연애와 완벽하게 이별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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