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moment of life
서른의 제주, 우리의 한 달 살이 장소였던 고산리는 첫인상이 아주 묘한 곳이었다. 크지 않은 마을이었지만 있을 것은 다 있는 곳. 관광지라기보다는 일상이 머무는 곳에 가까웠던 고산리에는, 오래된 분위기의 건물에 유달리 세련된 간판이 붙어 있었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마을 전체가 맞춘 느낌이었다. 특색 있게 보이기도 했지만, 묘한 이질감이 들기도 했다.
얼마 뒤, 우리는 그러한 이질감의 정체를 동네 초입의 작은 식당 사장님을 통해 알게 됐다. 밥을 먹으며 함께 대화를 나누던 도중, 사장님은 자신의 가게와 연관 지어 현재 고산리의 간판에 담긴 사연을 알려주셨다.
“저는 제 가게를 시간이 머무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한적한 시골 동네랑 어울리도록. 그래서 옛날 느낌을 내려고 소품에 페인트칠도 해 보고, 흠집도 내보고, 비 오는 날 밖에 내놓기도 했는데 진짜 옛것의 느낌이 안 나요. 특유의 옛날 느낌은 똑같이 만들어 낼 수가 없더라고요. 여기 고산리도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간판이 이렇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읍인가 면인가, 현대화 사업을 한다고 간판을 다 새 걸로 바꿔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버려지는 간판을 모아서 옥상에 보관하려고 했어요. 분명 다시 그 간판을 쓸 날이 올 거라고 믿었거든요. 누군가 의식 있는 사람이 다시 옛 모습을 살리려 하지 않을까 기대했었어요. 그런데 결국, 그 간판들 다 고물로 넘어갔어요.”
사장님은 씁쓸해 보였고, 덩달아 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모든 마을에는 사람들이 살아온 일상의 시간과 그들이 일군 역사가 스며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슈퍼, 문방구, 세탁소, 분식집 등과 같은 작은 상점의 경우는 주민들의 소중한 꿈이 담겨 있는 곳이라고도 생각했다. 마을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가게를 열고, 오랫동안 고민했을 상호로 간판을 달면서, 과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때로는 비가 오고, 눈이 오고, 어떤 날은 환한 햇빛이 가게를 비추는 그 숱한 시간 동안, 간판은 묵묵히 가게의 입구를 지켰을 거다. 나는 간판에 담겼을 시간의 흐름이 인간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긴 시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생업을 이어온 이들의 흔적과도 같았으니까.
어떤 이는 분명 마을의 현대화를 반대하고 나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는 관광 사업의 활성화를 이야기하며 마을의 변화를 지지했을 수도 있다. 내가 마을의 주민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옛 모습을 유지하는 것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 사이에서,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간판에 대한 이야기는 좁았던 내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인생이란 주변에 그 흔적을 남겨두기 마련이고,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여행은 곳곳의 흔적을 찾아내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날의 대화를 마음 깊은 곳에 새겨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