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 결혼에 대하여

by 흐를일별진



어린 시절, 내가 상상했던 미래의 모습은 이랬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늦어도 스물여섯에 결혼을 하고 서른에는 내 명의의 아파트에서 사는 인생. 그러나 물 흐르듯 시간을 써대며 서른셋이 되어버린 나는, 그 무렵의 상상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 깨닫게 됐다.


한때의 나는 현모양처가 꿈으로써 예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되기보다는 나다운 사람으로 행복하게 사는 게 더 간절해졌다. 그래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두렵기도 했다. 어쩔 수 없이 챙겨야 할 이들이 생긴다는 것. 내 가족이 아닌, 한평생을 남남으로 살아온 이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대립과 타협이 필요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물론 사람이란 게 닥치면 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다운 모습을 잃게 될 것만 같아서, 나는 결혼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혼자가 아니라는 책임감이 나에게 반강제적인 변화를 요구할 테니까.





사실 이런 고민을 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에게 결혼이란 그저 먼일일 뿐이었고, 결혼하기에는 내가 미성숙하다고 생각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꿈꾸는 것도 많았기에, 좀 더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은 지방 친구들과 달리, 거의 모두가 미혼이었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위기의식도 없었다)


그러다 작년 즈음부터 부모님이 은근슬쩍 “우리 딸이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생전 그런 말을 안 하던 분들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니, 새삼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실감 났다. 솔직히 정신 승리의 나이가 어릴 뿐, 실제로 내 나이는 대외적으로 결혼 적령기를 한참 넘긴 편에 속했으니까. 그래도 엄마 아빠의 결혼 이야기는 저 정도가 끝이라서 때가 되면 결혼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두 분은 나를 볼 때마다 심각하게 앞날을 걱정하셨다. 결혼 생각은 있는 거냐며 결혼의 필요성을 언급함과 동시에, 여자라면 아내이자 며느리로서 가정을 위해 충실히 희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두 분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면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시대가 어느 땐데 희생 같은 소리를 하시나. (누군가가 희생하는 결혼 생활은 불행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결혼이 아니어도 마찬가지고) 나는 참지 못하고, 그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가장 크게 타격을 줄 만한 말을 내뱉었다. 아주 발랑 까진 걸로 골라서.


“자꾸 그러면 어디 가가 씨 받아 온대이. 결혼 안 해도 애는 낳을 수 있다, 할매할배요! 원하나? 오늘 내 나이트 간다. 지금 바로 가? 애부터 가지지 뭐.”


가끔은 신발까지 신으면서 초강수를 뒀다. 당장이라도 나갈 것처럼 말이다. 그럼 할머니 할아버지가 ‘쟤는 누구 손녀인고’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시면서 상황이 마무리된다.

내가 생각해도 극단적인 말이긴 하다. 하지만 저 정도는 던져야 어르신들의 결혼 이야기가 쏙 들어가니, 편안함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두 분의 입장을 고려해서, 솔직하게 말하면 아예 결혼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비혼주의가 아니니까.

다만 남들 다 하니까, 서른셋은 결혼하기에 늦은 나이니까, 노산이니까, 결혼 적령기에 적당한 남자가 있으니까 등등의 생활적인 이유로, 떠밀려 결혼하기가 싫은 거다.


어릴 때야 결혼이 연애의 연장선이라 생각했지만, 나이 먹은 지금은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이 숱하게 보이는데. 일생일대의 결정을 쉽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연애와 결혼은 달랐다.

최악의 경우 참고 사는 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고 방어하는 일에 능숙하다 보니 선뜻 좋은 사람을 판단하거나 찾는 일도 쉽지 않다. (누군가에겐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의 기준이라는 게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지만, 최소한 나와는 잘 맞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결혼에 동반되는 수많은 손익을 인정하고 감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 장점이 너무나도 커서, 단점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고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로 단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경우를 말하는 거다. 그 정도로 꽂히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때는 만난 기간과 관계없이 결혼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굳이 애매한 사람과 결혼이라는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내 결혼은 분명 우리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흔히 남자들이 결혼하고 싶은 이상형을 말할 때 우리 집(시댁)에 잘하는 여자를 언급하기도 한다는데, 나도 마찬가지다. 나 또한 우리 집에 ‘먼저’ 잘하는 남자를 만나고 싶다. 최소한 내가 상대방 가족에게 마음을 다하고 싶을 만큼, 내 사람들에게 잘해주는 남자.



요즘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고, 그러다 보니 결혼하기에 늦은 나이라는 게 있을까 싶다. 아이를 낳기에 늦은 나이는 있겠지만, 임신이라는 축복도 우리 뜻대로 오는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는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의 손을 떠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선택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는 충분히 고민하고, 조금 이기적이어도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나는 아주 평온한 상태에 놓여있다. 만약 사랑이라는 게 이 감정의 평온을 깨는 거라면, 당분간은 교제 자체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여름날 실패한 소개팅이 그랬듯, 불확실한 감정에 마음을 쏟고 싶지 않다.

나는 서른셋이라는 내 나이가 너무나도 좋다. 이 나이 때만 이룰 수 있는 경험 기반의 성장이 너무나도 기대된다. 타인으로 인한 성장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이룩하는 성장.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이 기회를 나는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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