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여행 스케치

every moment of life

by 흐를일별진



제주도 고산리에서 한 달을 머물렀을 때. 나는 제주에서의 시간이 너무나도 빨리 흐른다는 것을 불안해했다. 기억하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남은 기간 동안 특별한 방법으로 제주를 남기기로 했다. 카메라 렌즈를 거치는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을 남기는 게 아니라 그날의 분위기, 날씨, 색깔, 그 장소를 둘러싼 모든 감각을 몸에 새기고 싶었다.


그때부터 나는 제주 어디를 가든 긴 시간을 들여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스케치로 남겼다. 우리가 머물렀던 집, 성산 일출봉, 방주교회, 혼자 갔던 신창리 해안 길, 카페 다금바리스타에서 본 차귀도 포구. 그리고 황우지 해안까지. 단 그 스케치에는 어떠한 색깔도 입히지 않았다. 그저 미완성의 그림으로 남겼을 뿐.



그 무렵 내 '여행 스케치'의 의미는 이러했다. 얇은 펜이 종이를 스치는 감각은 장소를 떠올리는 초의 심지가 될 것이고, 그 심지에 불씨를 지피는 것은 머릿속으로 채우는 그곳의 색깔이었다. 나는 시간이 지난 후, 완성된 그림에서 추억을 찾는 게 아니라 미완성의 그림에서 그날의 모든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고 싶었던 거다.





그리고 실제로 3년이 지난 지금.


가장 선명했던 제주 살이의 순간은, 지금도 내 방 곳곳에 붙어 있는 몇 점의 스케치를 통해서만 떠오른다. 한 달 동안 찍었던 수백 장의 사진보다, 긴 시간 공들여 응시했던 그날의 여행 스케치가 내 추억을 더욱더 빛나게 하고 있다.


찰나의 순간을 찍어내는 사진이 아닌, 마음에 드는 장소를 충분히 보고 받아들이고 ‘눈’으로 모든 순간을 기억하는 일이야 말로 우리가 마주한 풍경에 대한, 가장 완벽한 찬사가 아닐까.



카페 다금바리스타에서 본 차귀도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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