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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를일별진 Oct 15. 2019

자살에 대하여

2019년 10월 14일



유난히도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드디어 진짜 가을이 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높고 푸른 하늘에 석양이 넓게 드리워진 저녁이었다.


친구네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 소식을 들었다. 복숭아라 불리던 한 여자 연예인이 목숨을 끊었고,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한 장관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단 하루 사이에 몇 가지의 감정이 세상을 떠돌았다.


누군가는 숨을 쉬지 못할 만큼의 슬픔과 상실을 겪고 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세상에 대한 압박과 책임감과 회의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며, 그 모든 것들과 동떨어진 나는 그저 즐거운 마음뿐이었다.


어제는 누군가에게 죽음과 끝의 날이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남’일이었다. 하지만 그 ‘남’일이라는 게 제법 묵직하게 마음에 남아 있었나 보다. 친구와 즐겁게 놀고 헤어져 집에 돌아가는 길, 나는 갑작스러운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잘 죽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흔히들 말하는 호상의 개념이 아닌, 좋은 사람으로서, 충분히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미련 없이 깔끔하게 삶을 끝내는 것. 어떻게 죽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죽기 직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중요했을 뿐.


그래서 한 연예인의 죽음이 더욱더 안타깝게 다가왔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화려한 삶을 살았다. 수많은 팬의 힘이 되었을 것이고 롤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던 적이 있을까. 그녀는 누구를 위한 삶을 살았던 걸까. 자신에게 진정으로 힘이 되었던 적이 있을까. 어쩌면 그녀의 속은 처음부터 텅- 비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한때 사람들의 자살심리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이라는 책에 빠져 있었을 때가 있었다. 워낙 어려운 책이라 끝까지 읽지도 못했었는데,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었다. 바로 자살은 타살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나’를 죽인 건 ‘또 다른 자아’라는 해석이었다.


살고자 하는 마음과 더 이상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두 가지 자아의 충돌에서, 결국 우위를 선점한 건 삶을 끝내고 싶다는 자아였을지도 모른다.


흔히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에게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로 살았어야지.”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분명 그들에게 삶이란 죽음보다 더 지독한 거였을 거다.


인생은 우리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다. 숱한 변수가 존재하고 끝없는 상실을 경험해야 할 수도 있다. 어떤 이는 운이 좋아서 그 힘든 인생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찾아내곤 한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인생의 슬픔 속에 그대로 먹혀버린다. 행복을 찾을 기운도 의지도 없이. 누군가, 당사자를 탓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삶의 모양이란 애초부터 천차만별로 존재한다. 정답이란 없고 정상과 비정상도 없다.


그런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문제는 삶을 끝내는 것일 수도 있다. 나의 목숨은 내 손에 달린 거니까.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인생, 유일하게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타살로 규정되어야 할) 자살인 거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자살을 결정한 걸지도 모른다.


타개할 수 없는 어두운 인생의 늪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목숨을 끊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 보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그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 유일하게 내 자의로 이룰 수 있는 결과. 그게 바로 죽음이었다.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고, 떠난 목숨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들을 탓하고 비방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원인을 따지는 것 또한 이제는 의미가 없다. 단지, 그들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전, 그 서글픈 순간을 후회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을 힘들게 했던 이생에서의 해방감을 느끼며, 마지막 순간만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선택에 만족하며 떠났기를 바랄 뿐이다.


남아있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현실일지라도, 망자의 시간은 이기적으로 흘러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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