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미스코리아, 아나운서 김주희
방송작가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나름 많은 연예인을 만났고 몰라도 되는 것들을 알았으며, 이쪽 세계가 꿈꿨던 것처럼 아름답고 화려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연예인이 몇 명 있다.
그중 한 명이 전 미스코리아 출신의 아나운서 김주희 언니다.
언니와 나는 2016년 MBC 에브리원 <PD 이경규가 간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언니는 홍일점 출연자였는데, 촬영 전 첫 미팅 때부터 굉장히 긍정적이고 밝은 인상을 뿜어냈다.
보통의 연예인들, 특히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몇몇) 여자 연예인의 경우는 자신만의 '있어 보이는 척'이라는 게 있었다. 그녀들은 대체로 예민한 편이었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쉽지 않은 출연자에 속했다. 하지만 언니에게서는 그런 식의 예민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언니는 처음부터 작가들을 허물없이 대했던 것 같다.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저 담백하게 작가와의 미팅에 임했다. 나는 그러한 언니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솔직히 그 정도로 담백한 여자 연예인을 처음 봤다)
사실 그 무렵의 나는 작가 생활을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다. 업무 자체는 할만했다. 프로그램의 콘셉트 상, 경력자인 이경규 아저씨의 생각에 많이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촬영을 준비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작가들이었다. 몇 달을 함께 일했는데도 나는 그들을 믿지 못했다. 음흉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겉과 속이 다른, 뒤에서 무슨 말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하는 사람들.
회사에서의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고 모두를 사무적인 태도로 대하기 시작했다. 잘 웃지도 않았다. 마음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프로그램이 하루라도 빨리 폐지되는 것.
그러던 어느 날, 촬영 휴식 시간에 잠시 언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생겼었다.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는 나를 칭찬했다. 늘 밝아서 좋다 했고, 웃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으며,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도 했다. 같이 성장하자는 말도 했던 것 같다.
현장에서의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서 뛰어다녔었다. 바쁘게 움직이면 팀 작가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됐으니까. 그리고 현장은 늘 재밌고 매력적이었다.
다만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회사로 출근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밀려왔기 때문에, 현장의 재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남들에게 티를 내진 못했지만, 나는 늘 위로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스치는 인연이라 생각했던 출연자가 예상치 못한 위로의 말을 건넨 거였다.
언니의 관점에서는 함께 일하는 작가에게 전한 가벼운 호의였을 수도 있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든든한 위안. 그 위안은 회사에서의 나를 웃게 했고, 작가로서의 나를 움직이게 했으며, 낮아진 나의 자존감을 끌어 올렸다.
더는 작가들이 힘들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스쳐 갈 인연이었다. 무슨 말이 나오든 상관없었다. 내가 아니면 된 거다.
그렇게 나는 프로그램이 폐지될 때까지, 언니의 말을 기둥 삼아 웃으며 버텼다.
언젠가는 꼭 보답하고 싶었다. 더 높은 연차가 됐을 때 “함께 일하자.”라며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언니가 잘 됐으면 좋겠고, 언니만은 그 힘든 연예계에서 끝까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