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의 12월
마음을 막았지만 감정이 터졌고 가장 선명해야 할 기억은 술 때문에 흐려졌다. 누군가는 나로 인해 힘들었고 벌어진 상황은 되돌릴 수 없었다.
다음 날. 무언가를 예감한 듯 숙취 없이 눈을 떴다. 이상하게도 나를 괴롭히던 온갖 감정이 순식간에 정리된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사건은 사건으로 덮는다고 나는 전날의 실수를 마음으로 덮었다.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모든 걸 각오하고서라도 오늘은 말을 해야만 하는 날이라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끝을 내려면 사건이 터진 오늘이 날이다.
다행히 허공에 흩날린 마음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아서 "결국 이럴 운명이었나 보다"하고 받아들였다.
아침만 해도 걷기 힘들 만큼 부어올랐던 발목이 저녁이 되자마자 거짓말 같이 가라앉은 것처럼. 두 발로 땅을 딛고 서도, 더는 아프지 않은 것처럼. 마음도 결국에는 가라앉을 것이다.
서른셋의 12월.
참으로 귀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대함에 있어서 한층 더 성장한 기분이 든다.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사랑의 모양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직접 겪어가면서. 한때는 너무나도 명확한 감정에 나가떨어졌고 한때는 도저히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의 답을 찾느라 지쳐버렸다.
완벽하게 끊어냈으니 이제 남은 건 새로 시작하는 일이다. 어중간한 감정은 시작을 막고, 정리되지 않은 관계는 사소한 것에도 기대를 하게 만든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 사실 내 감정이 이상하다 느꼈을 때, 그때 끝냈어야 하는 관계였다. 어쩌면 욕심을 부린 것 같기도 하다. 처음에는 안타까움이었고 나중엔 사랑을 주고 싶다는 오만이었다.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컸는데, 어느 순간 그 행복에 내가 함께 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내가 뭐라고 그런 기대를 한 걸까. 아아. 끝내고 나니 감정이 제대로 보이는 구나. 후련하네.
분명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상황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가 됐는지 깨닫는 순간이 올 거다. 사람이 만나는 데에는 이유가 있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건사고도 인생이라는 스토리의 일부다. 스토리에는 개연성이 필수고 그런 면에서 이유 없는 사건은 없다.
그러니 딱 오늘까지만 가라앉아 있자.
흩어진 내 마음에 충분한 애도를 표현하자.
그리고 성장하자. 다시 떠오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