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 성추행 및 폭행 트라우마 이야기니 꼭 주의 부탁드립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어떻게 다섯 살의 내가 그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좀 더 행복한 유년이었을까. 오빠의 옆에 순전히 누운 내 성기를 들추고 손가락으로 순결한 구멍을 헤집었던 순간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 어땠을까? 맞춘 타이밍처럼 우리를 찾아낸 할머니는 끌러진 버클, 내려간 지퍼, 은밀한 곳에 들어간 그 손, 정말 그걸 보지 못하고 우리를 부른 걸까? 수십 년 동안 숨 쉬는 것만큼 나는 그 일을 곱씹어 봐도 모르겠다. 나를 찾으러 온 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 방을 나섰을 때 내 바지 지퍼를 올려준 손은 할머니였고 은밀한 공범자가 된 듯 쿵쾅대는 박동으로 처음으로 심장의 존재를 알았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을 박차고 터져버릴 듯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내 손을 꼭 잡은 할머니는 들으시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런 하찮은 기억으로 나는 수천의 밤을, 수천 번의 한 숨을, 수십 억의 눈물을 낭비했다.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첫 번째였을 뿐, 끝이 아니었으니까. 나의 길고 긴 악몽이 시작되고 있었다.
3-2.
나의 가해자, 오빠의 이름은 진일(*가명)이다. 그는 어느 해, 어느 월, 어느 일에 태어났으나 세상은 그가 구구단을 외울 수 있을 때까지 존재를 알지 못했다. 부산 근처 어느 지역의 어미를 가진 그는 축복보다는 외면을 받으며 태어나 세상으로부터 격리당한 채 어둑한 골목집에서 살았고 아버지는 대부분 그의 시간에 없었다. 오로지 어미의 보살핌을 받았으나 부족했고, 출생신고는 미뤄졌다. 그 시절 모든 미혼모들이 그러했듯이 방 안 한편에서 일정시간 드리워지는 햇빛과 비에 젖은 마당 한편 흙더미가 그의 시계이자 놀잇감이었다. 때문에 말이 늦었고 표현이 서툴렀다.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되는 아이로 태어났기에 어미는 아이가 커 가는 내내 불안에 떨었고, 자신의 미래를 걱정했다. 밥과 잠, 그 이상을 책임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상에 알리지 못할 아이가 어느샌가 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넘어서자 초조함은 배가 되어 어미를 덮쳤다. 만나는 새로운 남자에 아이에 대해 알리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다급해진 어미는 아이의 친부를 닦달했다. 네 새끼니까 네가 책임져. 지독한 회피형인 남자는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차마 도망치지 못하고 몇 년간을 피하던 잔소리에 결국 백기를 흔들었다. 그는 자신의 버려진 아이의 다시 버리기 위해 또 다른 시골로 향했다.
'아 좀 봐주쇼.'
아버지는 흡사 잠시 오줌을 싸러 다녀오겠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생전 처음 보는 흙집에 그를 떨궜다. 퉛마루 모서리에 앉아있다 담배를 피우곤 오줌 방울을 털어내듯 툭툭 그의 머리를 훝어내리고 떠난 후, 진일은 처음으로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친할머니를 만났다. 아버지의 친척인 사촌, 육촌들과 섞여 살았다. 세상이 그의 존재를 몰랐기에 학교도 가지 못하고 사촌들이 다니는 학교를 부러워하며 거친 사투리와 욕을 빼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 할머니와 단 둘이 아닌 둘이 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오로지 집과 거친 논밭, 울타리 없이 돌아다니는 닭과 외양간의 소들을 바라보는 것뿐이었고, 어린 그의 눈치에도 어쩐지 주변 집들과 다른 할머니 집은 보이지 않은 벽이 있어 감히 홀로 집 밖을 나다닐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왜냐면 진일의 친할머니는 본처가 아니라 김 씨 집안은 씨받이를 하기 위해 들인 첩이었고 같은 문중끼리 모여사는 동네에선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다들 '할매랑 욕쟁이 할매'라고 구별하여 불렀다. 모두가 아는 비밀이란 결국 차별이었다.
하여 진일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습한 산을 끼고 있는 흙집 한 편의 외양간 소들의 고갯짓을 세면서 놀았다. 놀러 나가고 싶었지만 예전부터 습지로 유명했던 동네는 아무리 햇빛이 쨍한 날도 신발 바닥이 진흙으로 참방거리며 젖는 게 싫었다. 대청마루에서 흙냄새와 젖은 풀냄새를 맡으며 육촌 형이 두고 간 책을 보며 반나절을 지내면 밭일을 나갔던 할머니가 끼니를 챙기러 돌아왔다. 그의 친할머니는 욕쟁이로 마을에서 이미 유명했지만 집안 종손이자, 아들인 진일에게는 험한 말 한번 하지 않았다. 귀한 손주. 대를 이어 줄 아들을 낳고자 없는 집에서 조금 있는 집의 첩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당신의 자식이 모르는 처녀와 새끼를 쳐 제사 지내줄 아들을 데리고 온 일에 크게 토 달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놓고 애정을 누워 잘 수 있는 지붕만을 제공할 뿐이지만 할머니는 그가 겪은 최악의 보호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자신의 사돈의 팔촌들에게 콩나물과 보리쌀을 내다 주며 사정을 읍소하여 네 귀퉁이가 낡은 오래된 교과서들을 받아왔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들은 그보다 더 대단했으나 지나치게 검소하게 살아온 그녀는 그것이면 되는 줄 알았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씨받이로 들어온 집안에서 정실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세월에 수십 년이었다. 그저 누군가에게 물려받은 옷가지와 낡은 책들을 손주에게 건네주며, 출생신고를 해주지 않는 아들을 원망하는 욕지기를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내내 국민학교에 입학을 놓쳐버린 소중한 김 씨 집안 장손의 눈치를 살피며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진일은 엄마와 함께 살던 그 골목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소냄새나는 시골 흙집보단 쿰쿰한 골목집이 나았다. 풀밭 냄새 밴 욕쟁이 할머니의 고쟁이보단 그래도 부드러운 가슴을 감싸는 엄마의 블라우스가 좋았다. 물론 엄마가 아니라 '이모'라고 불러야만 했던 것만 빼면.
'서울 가자.'
이번엔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손을 잡고 흙집을 나섰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면서 낡은 버스 타고, 다시 터미널에 가서 새 버스를 타면서 어린 진일의 가슴을 콩콩 뛰었다. 서울이라는 낯선 단어 속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언제나 그리운 이름인 엄마와 붙어 있지 않은가. 늘 곁에 없는 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변호는 언제나 '서울에 돈 벌러 갔다'는 말이었다. 그럼 엄마도 같이 있을까? 언제나 할머니는 그 대답을 얼버무리곤 했다.
'서울 가면 니 어메도 있고 핵교도 댕길 수 있다.'
콩콩 거리던 심장이 기대감으로 쿵쾅거렸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는 그야말로 희망으로 가득 찼다.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국민학교에 드디어 갈 수 있게 된 희망, 둘 중 어느 것이 더 그를 설레게 하는지 몰랐다. 앞으로 닥칠 그 어떤 시련도 그 시골 촌구석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꽤 오랜 시간 동안 버스 안에 갇혀 있었지만 잠도 잘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집에 도착했을 때, 진일은 좁은 수돗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낯선 여자를 마주하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아니야. 잔잔한 꽃무늬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예뻤지만 소년이 기다리던 여자가 아니었다. 입을 뗀 것은 진일의 뒤에 선 할머니를 알아보고 천천히 일어난 여자가 먼저였다.
'얘는 누구예요, 어머니?'
'키아라.'
'네?'
'잔말 말고 호적에 올리고 핵교 보내라.'
그리고 진일의 땀이 밴 손을 마치 크고 무거운 봇짐을 끌러 내던지듯 여자에게 던졌다. 이제 네 몫이다, 이어달리기라도 하듯 엄마에게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할머니에게 던져진 자신의 손이 다시 잡을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에 흔들거렸다. 진일이 몹시 당황해 여자를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순간 앞에 선 여자의 봉긋 솟은 아랫배가 보였다. 시골에서도 꽤 본 적이 있는 태였다. 숨이 멈췄다.
그 날밤. 퇴근한 아버지와 진일은 다정한 말 한마디 없었다. 여자, 아니 그의 새엄마는 아버지가 돌아오자마자 내내 오열하고 또 오열하고 아버지를 저주의 말을 쏟았다. 도망칠 곳이 없는 한 칸짜리 방에서, 부엌 아궁이로 눈치껏 쭈그려진 진 채 진일은 현실을 깨달았다. 무책임한 엄마와 회피형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출생신고조차 하지 못한 자신을. 내내 버스를 타고 오면서 쌓아온 희망을 앞에 곤로 속 타고 남은 연탄 위에 던졌다. 문지방 너머로 숨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서로를 찌르는 날카로운 단어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되새기며 생각했다. 괜찮다. 그 흙집을 벗어나 학교만 갈 수 있다면. 진일은 타고 남은 회색 연탄재를 부지깽이로 부수며 다짐했다. 꼭꼭 부수며 오고 가는 고성들을 마음속에 새겼다. 기억하고 있다가 반드시 갚겠다는 마음은 철근처럼 그의 흉곽을 짓눌렀다.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진 가슴에 타오르기 시작한 불씨를 숨겨야 했다.
며칠이고 여자는 이불을 둘러쓴 채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시계처럼 정해진 시간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간혹 해가 진 후 돌아와서는 이불속의 여자와 고성을 주고받으며 싸우다 다시 나갔다. 진일은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와 여자 사이에는 혹시나 자신이 없으면 어딘가 버리고 올 것을 걱정한 할머니가 있어 시골집에서 그러했듯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해 주었다. 서울만 오면 국민학교에 갈 수 있을 거란 할머니의 약속을 믿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잠들기를 며칠. 슬슬 시골의 사촌형들이 그리워질 때쯤 이불속 여자가 기어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그를 두고 집을 나가버렸다. 진일은 여자의 뒷모습에서 어쩐지 엄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해가 질 즈음이 되어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올 시간이면 그래도 이불속에서 나와 봉긋한 배로 수돗가에 주저앉아 된장찌개에 넣을 파를 다듬던 여자였다. 이렇게까지 오지 않는 거면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처럼 심장이 쿵쾅대진 않았다. 버림받는 것도 익숙해져 그저 열리지 않는 문고리를 향한 두근거림이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 여자가 돌아왔을 땐 모든게 뭔가 달라져 보였다. 퉁퉁 부은 눈, 부은 얼굴,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 부스스한 머리카락 등이 집을 나갈 때와 달랐다. 그러나 가장 달라진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린 진일의 눈에도 봉긋했던 배가 납작해져 있었다.
'이제부터 내가 네 엄마야.'
선전포고와 같은 선언이 여자에게서 떨어지자 진일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생각했다.
드디어 나도 학교에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