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하루아침에 부모가 생긴 진일은 그가 유일하게 바라던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새엄마가 된 여자는 몇 살이냐고 그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대답하지 못했고 여자는 입학 적정 연령대를 대충 작성해 서류를 꾸며 그를 입학시켰다.
'앞으로 내가 네 엄마야.'
파리한 안색의 여자가 그렇게 말했지만 진일은 공감할 수 없었다. 눈 밑이 퍼렇고 계속되는 아버지와의 싸움에 날이 갈수록 초췌해진 여자는 갓 스무 살이 되었고 아랫지방 어느 곳에 있을 자신의 엄마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혈관을 흘렀지만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눈앞의 여자를 엄마로 받아들이자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졸업을 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취직을 하고, 어른이 되어 진짜 엄마를 찾을 것이다. 엄마는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공부' 뿐이었기에 쉬웠다. 학교에 들어가 사귄 친구들과의 놀아주는 대신 당신이 만족할 만큼 그를 방에 가두고 숙제며 복습이며 예습을 시켰다. 모든 게 부서진 채 시작된 관계였으나 완벽하길 원하는 것이 엄마의 성정이었고, 진일은 적게 반항하고 대부분 순응했다. 그 과정에서 훈육도 있었다. 종종 회초리를 들었고 사랑의 매라고 말했다. 엄마는 항상 당신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때까지 진일을 방이 가뒀다. 혼자 남은 방 한편엔 텅 빈 요강만이 그를 반겼고 어린 나이지만 치욕과 모멸감을 느꼈다. 아마도 그의 강박과 결벽증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원하는 성적을 가지고 엄마에게 보여줄 때마다 엄마는 웃었다. 순수한 기쁨은 아니었다. 진일의 전교 1등 성적표는 엄마가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포장되어 아버지의 앞에서 일장 연설과 같은 자랑으로 변모하고 아버지는 항상 '그래, 잘했다' 그 외의 칭찬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웃음은 그나마 순수한 편이었다. 성적표를 벽에 붙이는 엄마 뒤를 이어 몇 번이나 오가며 들여다보며 슬핏 짓는 미소의 끝엔 보조개가 달려 있었다. 활발한 엄마도 낮 동안은 항상 일을 하러 나가거나 누군가를 만나러 집을 비웠지만 아버지가 돌아오는 저녁 시간만은 들어와 밥상을 차렸다. 뒤돌아서 주걱으로 소반 위에 밥을 퍼담는 엄마의 배가 다시 봉긋해지고 엄마의 미소가 피어남을 따라 보조개가 보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태어날 아기에게는 아마도 보조개가 있겠지. 진일은 자신의 밋밋한 뺨을 더듬으며 적당히 보조개의 위치를 가늠해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뗐다를 반복하자, 거울을 속의 자신에게도 보조개 같은 세로로 긴 주름이 생겼다가 이내 사라졌다. 문득 진짜 엄마와 살았던 꿉꿉한 그 방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눈에 띈 자신의 성적표만이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채 벽에 매달려 휘부꼈다. 고작 테이프 한 뼘에 아슬아슬하게 이 벽에 붙은 성적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갇혀, 요강에 오줌을 싸지르며 내내 노력의 결과로 얻은 소중한 숫자 1이 덧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낡은 방 안에서 오로지 자신의 것은 초라한 한 장인 것을 되새겼다. 커다란 눈동자는 고요했으며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런 감정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꾹꾹 마른 눈물샘을 누르며 다시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월반하라며 사다 주신 중학생 형들이 푸는 문제집의 글씨들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은 그저 시력이 떨어진 이유 외엔 없을 것이다. 내일은 안경을 사달라고 해야겠다. 진일을 그렇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열 달을 반듯이 채워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 열 달 내내 아들을 원한 것은 엄마를 비롯한 모두였다. 그러나 너무나 염원하면 되려 이뤄지지 않는 것처럼 엄마의 첫째는 딸이었다. 고지식하다 못해 무식한 깡촌의 시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며 엄마를 타박하고, 이에 질세라 아버지는 '너는 고추를 못 낳는 몸이다'라고 한껏 비웃으며 갓 출산한 엄마와 그의 소중한 첫 딸을 보러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타박해야 마땅한 시어머니였으나 엄마의 항의 섞인 투정에 당신은 전화로 '병원은 갈 필요가 없겠네. 계집애니까'라고 뱉고 말았다. 엄마의 첫 딸은 그렇게 첫 번째로 엄마 외 모든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기고 태어났다.
마침 화투와 여자와 술에 빠져있던 아버지에게는 엄마를 힐난할 쉬운 핑계가 되었다.
'하이고, 그깟 계집 낳겠다고 그 지랄을 떨었냐.'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배로 낳은 아이를 안는 순간 세상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사랑했다. 진일도 8살 어린 동생에게 심각한 질투를 느꼈다. 채 자각하지 못하는 나이였지만 감정이야 말로 누구의 평가보다 정확했다. 엄마의 사랑은 곧장 당신의 아이에게로 향했다. 자신의 1등 성적표는 아이가 싼 똥오줌 기저귀 옆에서 몇 시간이고 나뒹굴었지만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럴수록 더욱 진일은 책과 공부에 매달렸다. 응당 1등이 아니면 앞으로 부모의 모든 관심이 아이에게 향할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그는 머리가 비상했다. 자신이 채 마치지 못한 높은 학업에 대한 에고가 있는 엄마를 위한 공부는 그에게 너무나 쉬웠다. 국민학교 선생님들은 진일이 천재라고 통신문에 써서 그녀의 높은 코를 더 높이는데 일조했다. 세상 사람들에겐 엄마에겐 공부 잘하고 똑똑한 첫째 아들과 갓 태어난 귀여운 딸을 가졌으니 남 부러울 것이 없겠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칭찬을 받으면 받을수록 당신은 자신의 아들에 대한 갈망이 커졌다. 점점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에 주변의 시답잖은 이야기에 물들어, 자신이 아들을 낳아주지 못해 밖에서 계집질을 하고 다닌다고 여기며 그를 붙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본인은 모르는 사이 그것은 집착이 되었고 낡은 대물림이 되었다. 밖에서 애비가 낳아온 아들을 구박한다고 여긴 시어머니가 들이닥쳐 시작된 시집살이와 남의 아이, 그리고 자신의 아이 둘을 돌보는 독박 육아에 그녀도 점차 얇은 신경줄의 소유자로 변모했다. 우아한 서울 새침데기였던 그녀는 고작 이십 대였다. 자기감정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그 나이에 생전 처음 본 아이를 키우며, 학부모가 되어 응당 자신의 나이를 높여 말하며 세상 다 아는 척, 어른스러운 척 진일을 제 아이처럼 키우고 있다 자신을 세뇌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아이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했다.
어쩌다 한 번 정도, 수를 받지 못하고 우를 받아온 성적표를 두고 진일을 히스테릭하게 혼내기도 했다. '수'들 사이에 오타처럼 섞여 있는 그 '우'가 그날따라 거슬릴 때, 마침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하지 않는 진일이 미워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을 딸 밖에 못 낳는다 비난하는 남편 같아서 그를 향해 못내 '네 아빠를 닮아서 그러냐?'라고 사납게 목성을 높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으나 매일이 아슬아슬한 유리바닥을 걷고 있었다. 진일은 그때마다 그녀의 품에 소중히 안겨있는 자신의 배 다른 동생을 보며 더욱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진일은 동생의 맑은 두 뺨에 보조개를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노려봤다.
자신을 힐난하는 엄마와 똑같고 아버지의 오른쪽 보조개와 닮은 그것.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그 작은 볼우물이 그에게 절대적 절망감을 선물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매일 아침 세수하며 볼을 찔러봐도,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은 종이를 가지고 온다 해도 눈앞의 엄마, 아니, 새엄마에겐 자신은 언제나 '네 아버지의 아들'일 것이다. 새엄마의 품 안의 아기와 자신은 영원히 절대로 같은 선 상에 놓일 수 없다. 밋밋한 볼을 가진 그는 그 보조개가 갖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있은 책의 어느 구절에는 세상의 물줄기와 혈연, 이 두 가지는 절대 거스를 수 없다고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틀린 말이었다. 새엄마의 품 안의 작은 아이를 볼 때마다 진일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을 느꼈다. 처음 느낀 조용한 살인 충동이었다. 내일이면 사라지길 바라고 바랐지만 불면 날아가랴 앉으면 꺼지랴, 새엄마가 애지중지하는 동생은 절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가 없었다. 오히려 새엄마는 진일이 하교하고 돌아오면 동생을 맡기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무신경한 사이 당신도 집 밖으로 나돌 명분을 만들어 나가면서 종종 여동생은 그의 손에 떨어져 반나절 넘게 지내곤 했다. 시간 맞춰 분유와 기저귀를 갈아주면 진일은 생각했다. 이것은 알아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망가뜨리면 된다. 천천히. 소년의 오래 계획된 악행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