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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지다사라지다 Aug 06. 2020

코로나 때문에 임종도 못 할 지경

할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아직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임종臨終

임종은 환자의 병환이 위독해지면 근친자가 곁에서 모시고 안팎을 안정시키며, 운명하면 사자의 신체를 정제하는 것을 뜻한다. 사전적 의미는 죽음을 앞둔 부모의 손발을 잡고 숨이 끊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의식이다. 


나는 젖먹이 때 외할머니께 맡겨졌다. 성미 급한 엄마 때문에 갑작스럽게 생긴 집안의 첫 손주라 얼떨떨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이내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온 사랑을 내게 주셨다.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일을 하다 주말에만 찾아오는 엄마를 보고 나는 낯설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아무리 지극한 손녀 사랑이라지만 24시간 손이 가는 고된 육아를 노인이 도맡아 하다 보니 병이 안 날 수가 없다. 가족 간 합의에 의해 나는 친가로 보내졌다. 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육체적 고난보다 나와의 헤어짐이 더 괴로우셨던 모양인지 일주일을 앓아누우며 날 다시 데려오라고 애원하셨다. 그렇게 나는 다시 외할머니 곁으로 왔다. 


어린 나이지만 내가 현관문을 들어설 때 할머니의 함박웃음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고작 일주일이었는데 1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겨주시고, 생일도 아닌데 상에 더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날 위해 차려진 음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입이 짧은 나였지만 왜인지 그날만큼은 입이 터져라 밥을 잘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거기서 나를 굶긴 거 아니냐며 우셨다. 


나도 나이가 들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보니 아이의 입에 들어가는 밥 한 숟갈이 얼마나 뿌듯하고 감사한 일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들기도 무거운 압력밥솥, 그리고 수많은 스뎅 냄비와 프라이팬들이 닳고 닳아 코팅재가 벗겨진다는 것은 단순히 세월이 흘렀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수한 관절의 움직임과, 더운 불 앞에서의 사투와, 밥을 먹여주고 싶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 치열했음을 의미한다. 


6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밉다고 했다. 젊었을 때 할아버지가 퇴근하고 오시면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발을 씻겨드렸다고 한다. 그 옛날 가장의 위엄과 가부장제와 관련된 무용담 같은 것이다.

"저 인간은 한 번도 나 먹으라고 맛있는걸 입에 넣어준 적이 없어. 수진아 너는 맛있는 거 있으면 네 입에 먼저 넣어주는 남자 만나거라. 살아보니 그게 그렇게 서럽더라."

나만 보면 그렇게 할아버지에 대한 투정을 쏟아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을 매일 차려주셨다. 늘 할아버지가 식사하고 나시면 그 설거지를 하면서 국그릇에 대충 담은 밥을 서서 드셨다. 


"앉아서 먹어 할머니. 다리 아파."

"아이 됐다. 나는 입맛이 없어서. 이것만 먹으련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일, 빵을 사가도 한쪽 썰어서 내 입에 넣어주시고는 남은 건 잘 보관했다가 가끔 들르는 아들네 챙겨주시기 바빴다. 할머니의 밥은 늘 그랬다. 한 번도 자신을 위한 밥상을 차려보지 못했던 할머니는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각자 가정 챙기느라 자식들도 자주 못 오자 밥 먹는 법을 잊으셨다. 약을 먹기 위해 식은 밥을 억지로 입에 밀어 넣는 것이 식사의 전부였다. 아들 네가 모시고 살겠다는 것도 눈치 보인다며 거부하고 홀로 집에 계시니 외로움이 온몸을 갉아먹어 치매가 찾아왔다. 수술한 무릎을 잘 쓰지 못해 할머니는 집 마당에 쓰러지셨고 옆집 이웃이 발견해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집에 다시 가지 못하고 있다. 


내가 출산하고 조리원에 있을 때 삼촌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조리원을 나와 50일 정도 되었을 때 남편의 부축을 받아 할머니를 뵈러 갔다. 갈라놓은 배가 아직 완벽히 아물지 않아 절뚝이면서 미로 같은 병실을 뒤져 할머니를 찾았지만, 할머니의 이름이 쓰여 있는 병실에 할머니가 없었다. 실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는데, 너무 노쇠하고 초췌하고 작아지셔서 내가 못 알아본 것이다. 


"할머... 니"


나는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날 알아보시고 웃으시는 할머니 앞에서 울면 꼴이 이상해질 것 같아 있는 힘을 다 해 참았다. 몇 년 전에 한쪽 눈의 시력을 잃으셨다. 남은 눈으로 날 보시고는 "수진아. 네가 왔구나." 하며 30년 전의 그 미소를 짓고 계셨다. 같이 온 남편을 보며 "응. 수진이 남펜이여? 처음 보네. 반갑네. 반가워" 하셨다. 결혼 후 명절마다 할머니를 찾아뵙고 같이 밥도 여러 번 먹었는데 처음 본다고 하셨다. 


치매가 오면 기억이 퇴행한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먼 기억으로 서서히... 할머니는 그날 남편에게 내가 세 살 때 춤을 잘 추었던 얘기를 하셨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궁둥이를 들썩이며 얼마나 신나게 잘 췄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 애엄마가 되었는데, 할머니는 나를 세 살짜리 아이로 보셨다. 한 3년 전만 해도 내가 중학생일 때 편식이 심했다고 얘기하셨는데, 그 사이 시간은 거꾸로 흘러 나는 세 살이 되었다. 여기서 시간이 더 흐르면 할머니 기억 속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더 아기 시절로 돌아가고, 그렇게 또 시간의 뭇매를 맞으면 나는 사라지는 건가? 그때가 되면 나를 보시고도 "워떤 아가씨여?"라고 하시는 건가? 두렵다. 너무너무 두렵다. 


그 사이 할머니는 전쟁 같은 대학병원 입원생활을 하다 상태가 더 나빠져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 내 아기는 그 새 돌이 지났고, 요양병원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다. 뇌출혈이 왔고, 식사를 못하셔서 콧줄(레빈 튜브)로 영양을 공급받고 있다. 거동은 못 하시지만 담당 간호사 분과 통화해보니 대답 정도는 하신다고 한다. 병문안이 가능한지 물으니 코로나 때문에 제작한 면회실에서 창문 너머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더 회복이 되셔서 집에 돌아오시면 좋은데, 혹여나 더 위중하게 되어서 돌아가시게 되면 어쩌지. 나는 할머니 손 한번 잡아드릴 수도 없는 건가. 시력도 안 좋으셔서 창문 너머로 날 알아보실지 모르겠는데. 치매가 더 악화되어서 날 보시고도 더 이상 내 이름을 불러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또 두렵고 먹먹하다. 


코로나 감염 확산으로 일상의 많은 부분이 바뀌었다. 경사(慶事)인 결혼식이나 돌잔치에도 영향이 있지만, 애사(哀事)인 환자 병문안이나 장례식에도 큰 지장이 생겼다. 요양병원 집단 감염 사태가 보도되었고, 외부인의 접촉은 차단되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편안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은 소수에게나 주어지는 축복인 것 같다. 코로나가 터지기 이전에는 요양병원에 모셨어도 가족들이 왕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이럴 때... 손 한 번 잡아드리지 못하는 이 시기가 원망스럽다. 고초를 겪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니겠지만, 이대로 영영 이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쳐지도록 두렵고 슬프다.


내가 어릴 때 이런 기도를 했었다. "하느님, 우리 할머니가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할머니가 정말 좋고 없어진다는 게 상상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음... 제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을 때까지 살아계셨으면 좋겠어요. 제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착한 아이가 될게요." 


그때는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게 아주 먼, 머나먼 미래의 일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결혼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항상 뜻대로 인생이 흐르지 않기에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게 되었다. 아차! 싶었다. 아 그럼 우리 할머니 어떻게 하지.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더 오래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 내 아이가 재롱도 부리고 "할미, 할미"라 부르며 안길 수 있을 때까지. "요 놈은 눈은 지 아비 닮고 코는 우리 수진이 닮았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하며 안아주실 수 있을 때까지. 정작 현실은 계속 병원에만 계셔서 내 아이를 한 번도 만나보신 적이 없다. 하느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지금 와하는 후회는 기도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할 걸 그랬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치매 걸리지 않고 병원신세도 지지 않고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할머니,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창문 너머로 할머니를 보며 울고 싶지 않아요.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 품에서 울고 싶어요. 우리 아가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할머니 시야가 더 흐려지기 전에. 할머니 기억 속에서 내가 저물어가기 전에. 할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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