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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아지다사라지다 Feb 27. 2023

가정폭력 앞에선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워하지 않는 가해자, 두려워하는 피해자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은 신고를 망설일 수밖에 없다.

한 집에 거주하는 상황에서 혹여나 신고 후 남편이 더 화를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신고를 해도 좌절되는 경우가 있었다.


4년 전 아이가 생후 6개월 정도 되었을 때다.

그때도 남성 경찰관 두 분이 집에 와주셨다.

자초지종을 들으시더니 한 분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편분을 신고 하실 순 있어요. 하실 순 있는데...

신고하시면 저희랑 같이 가서 두 시간 정도 조사받고 다시 집에 오실 거예요.

지금 술에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혹시나 다시 집에 왔을 때

남편이 더 화가 나서 더 때릴 수도 있어요.

이건 걱정돼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하지만 신고하실 순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차마 신고할 수 없었다. 그때는 신고전화에 의한 출동.

거기서 마무리된 것 같다.




사실 4 년 전 그 경험 때문에 다시 경찰에 신고하는 게 맞는지 걱정은 되었다.

하지만 오늘 밤을 넘겨버리면 술에 깬 남편에겐 아무 일도 없었던 어제가 된다.

나의 공포와 슬픔과 좌절은 그에게 작은 해프닝 정도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찰 분들의 일 처리 방식이 약간 달랐다.

나를 한쪽으로 앉힌 후 사건 경위서를 써 달라고 했다.

날짜와 인적사항 그리고 당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설명.


술에 번뜩 깬 남편이 방에서 나왔다.

내가 바닥에서 종이에 뭘 쓰고 있으니까 지금 뭐 하는 거냐며 다가왔다.

내 옆에 있던 경찰분이 깜짝 놀라며 그를 저지시켰다.


경찰분들은 나의 상처와 현장 사진을 찍으셨다.

그리고 서류를 챙겨 나가시며 담당 형사가 배정되면 연락 올 것이라고 했다.


경찰분들이 집에서 나가자 남편은 한심한 눈빛으로 나에게


"너 약 처먹었냐? 쓸데없는 짓을... 일 하는 사람한테 잘하는 짓이다."


그의 말대로 쓸데없는 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딘 가에는 기록을 남겨야만 할 것 같았다.

아이에게 너의 어미가 무기력하게 벽만 쳐다보며 울지 않았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며칠 후 담당 형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사건이 접수가 되었고

남편이 먼저 조사를 받고 나도 역시 조사를 받으러 관할 경찰서에 와야 한다고 했다.

아이를 볼 사람이 나뿐인데 아이를 데리고 가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다.


남편은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은 후 나를 나무랐다.


"야. 나 매일 일 나가는데 언제 거길 왔다 갔다 하냐?

거 지난번처럼 신고 안 하겠다고 네가 얘기해.

먹고사는데 보탬이 안 될 거면 방해라도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니야."


남편은 어차피 매일 술을 먹지만

내가 쓸데없이 신고를 하는 바람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술 먹는 양을 늘릴 것이 뻔했다.

그렇게 되면 그 피해는 아이가 받는다.

나는 겁이 났다.


"형사님. 저... 죄송한데요. 혹시 신고를 취소... 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게

남편도 뭐 미안하다고 하고... 일도 바쁘다고 하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 그게. 가정폭력은 특별법으로 바뀌어서 신고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분이 취소를 원한다고 해서 간단하게 취소될 수 있는 게 아니고요

저희 권한으로도 할 수 없어요. 가정폭력에 관한 사건은 무조건 검찰로 송치됩니다."


지난 4년 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4년 전에 나만 운이 없었던 건지.

아무튼 신고를 취소해보려고 했는데 안된다고 남편에게 전하니 문자가 하나 왔다.


"자랑이다."


"나도 노력했잖아. 그럼 어떻게 해. 당신 그렇게 술 취해서 인사불성인데,

나라고 무섭지 않겠어?"


"그렇다고 경찰을 불러? 그냥 미친놈이 미친 짓 했다고 넘어갈 수도 있었잖아!"


아마도 나는 남편에게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인 모양이다.

내 신변이 두려워 신고를 했지만, 남편은 그것마저도 불필요한 일이라고 하니

나는 쓸데없이 일을 크게 만들어서 피곤한 남편을 돕질 못할 망정

방해나 하는 한심한 여편네로 낙인찍혔다.


"그래. 미안해."


나는 남편에게 사과했다. 그래야 오늘 술을 덜 마실 것 같았다.

술.

그 술.

술이 지배해 버린 우리 가정은 매일 퀴퀴한 알코올 냄새를 견디어야 했다.


술에 잠식된 남편의 눈은 예전의 눈이 아니었다.

흰자는 점점 누레지고 동공은 갈피를 잃었다.

그리고 그 눈에는 명확한 분노가 있었다.

나를 향한 분노인지,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 모르겠지만

술은 확실하게 내면의 분노를 밖으로 집어 당기고 있었다.


내가 다치는 건 괜찮지만, 그 분노가 아이에게 미칠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하지만 제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은 뜬금없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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