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후회
인생을 술이 아닌 사랑으로 채워라
항상 유쾌한 성격의 선배가 오랜만에 내 안부를 물었다.
"어이. 요즘 어떻나? 잘 지내나?"
"아 네. 저야 뭐... 그냥 연명하고 있죠."
"뭐라고? 염병하고 있다고?"
"푸하하하. 생각해 보니 그것도 맞네요."
연명하기 위해 염병한다 라는 말이 딱 맞겠다.
염병하기 위해 연명한다고 하면 내가 너무 속상하지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방구석에 누워만 있기에는 햇살이 너무 눈부시고
자책만 하기에는 우린 서로 열심히 인생을 살았고
희망을 버리기에는 우리의 가슴이 아직 굳지 않았고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먼바다의 파도가 사무치게 아름답다.
나 자신을 내려놓자니 내 심장은 아직 뛰고 있다.
슬프다고 한탄하자니 날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가 너무 맑다.
매일 술을 먹는 남편의 눈은 건강 때문인지 누렇고 혼탁하다.
신혼 때는 안 질환인 줄 알고 안약을 종류별로 사다가 넣어줬는데
눈빛이 변하질 않았다.
모든 아이들이 같지만 아기의 눈동자는 참 맑다.
너무 투명하고 빛나서 그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부끄러울 정도다.
아기가 울면 하늘에서 화산재와 벼락이 내려치고
아기가 웃으면 바람과 해와 나무들이 같이 웃는다.
아이와 온전히 하루를 함께하는 것은 분명 고되지만
아이의 모든 순간에 내가 묻어있어서 기쁘다.
아이의 살 내음, 기저귀를 떼다 바닥에 흘린 소변과
한참을 끙끙대다 시원하게 내지른 대변을
내가 만지고 냄새 맡고 닦아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난 엄마다. 그리고 아기를 함께 만든 아빠도 있다.
아기의 아빠도 이 순간들에 함께였으면 좋겠다.
지나치면 다신 볼 수 없는 고귀한 순간들
아이의 미소 한 바구니에 녹아버릴 근육통
말이 느린 아기가 한 마디씩 선물처럼 내뱉는 단어들
집보다 돈보다 천금보다 귀한 이 순간들을
아이의 아빠와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술 때문에 힘들어서 피곤해서 누워만 있어야 한다고 말하니까
나는 늘 아이와 둘만 남겨졌다.
하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 때마다
기가 막히게도 아기는 나에게 그 감정을 싹 씻어 줄
기쁨과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시아버님이 나를 불러 앉혔다.
아버님은 빛바랜 흑백 종이 더미를 나에게 주셨다.
남편의 국민학교 시절 생활기록부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걸 왜 나에게 주시는지 이유는 여쭙지 않았지만
마치 인수인계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 녀석. 성적표 보이지? 온통 수수수... 머리는 아주 영특했다고.
내가 너에게 이걸 주려고 정리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
참 부끄럽더라. 나는 이 녀석 성적표를 이제야 봤다. 참 한심하지?
몇십 년이 지나서야 아들 생활기록부를 이제야 본다는 게.
아비 자격이 있나 싶다. 이때 나는 회사 다닌다고 맨날 늦게 들어오고
내 자식이 어떻게 크는지 살펴보지 못했어. 그게 이 나이 먹고 제일 후회되는 일이다.
돈 잃은 거? 집 날아간 거? 그것도 물론 후회지.
그런데 정말 큰 후회는 내 자식이 크는 걸 지켜보지 못했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저 놈에게 참 미안하다."
아버님은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직접 전하기 부끄러워 나에게 대신 전하셨다.
부디 남편은 아버님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음속으로는 아버님을 아끼면서 겉으론 퉁생이를 놓는 남편을 알기에
부디 제발 부디
나의 부탁이 아니라
아버님의 진심 어린 충고와 걱정을 남편이 이해했으면 좋겠다.
방구석에 누워만 있기에는 당신의 아이가 너무 눈부시고
자책만 하기에는 당신은 열심히 인생을 살았고
희망을 버리기에는 당신의 가슴이 아직 굳지 않았고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당신에겐 남은 생이 있다.
그 인생을 부디 아름답게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