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어디 한 달 살기, 슬로우 라이프가 유행하기도 전이 었을 텐데 너무도 가고 싶었던 치앙마이.
어쩌다 보니 치앙마이는 이번 여름에서야 다녀왔다. 10년 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여행객을 받아낸 치앙마이는 내가 동경하던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콜마저도 내리지 않아 너무나 더운 땡볕 아래, 맛있는 커피에 위로를 건네며 무수한 맛집들 틈바구니로 나는 이 여행의 의미를 꽤나 찾아 헤매었다.
결론은, 오랜 동경이 사그라드는 아쉬움을 <여행의 이유>가 달래준 여행이랄까.
캠핑 클럽에서 효리언니는 음악은 1차원적인 거 같다며, 바다 오면 바다 노래 듣고 싶고 별 보면 별 노래 듣고 싶다고 했는데, 책도 마찬가지다. 여행지에선 여행 에세이나 적어도 방랑하는 여행 소설들이 좋더라.
그런 의미에서 <여행의 이유> 한 권쯤 챙겨서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을 성싶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작가가 겪는 이런저런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획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오는 그런 여행기가 있다면 아마 나는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재미가 없을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독특함을 엿본 것은 알쓸신잡에서였다. 통영에 가면 다들 해산물 메뉴를 고르는데 혼자 짬뽕을 먹으러 간다거나, 강릉에서는 스테이크, 경주에선 피자를 고르는 남다른 스타일을 보여줬다. 그래서 작가의 여행기가 더욱 궁금했다.
이런 사람의 여행은 도대체 어떻단 말인가!
비자 없이 중국으로 떠났다가 추방당할 정도라면, 이 책이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이 소설 속 심리 묘사를 통해 명확해지듯이, 우리의 여행 경험도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좀 더 명료해진다. 세계는 엄연히 저기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는 그것을 매개할 언어가 필요하다. 내가 내 발로 한 여행만이 진짜 여행이 아닌 이유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 교수는 스마트폰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도 인류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시도했고 전 세계의 공감을 얻었다. 그가 세상의 이치를, 사물에 대한 이해를 꼭 직접 경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연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치앙마이에서 더위와 고군분투하며 어쩌다 마주치는 조그맣고 어여쁜 골목길과 아담한 가게들에서 순간순간의 예쁨을 만끽하며 조금씩 더위를 이겨냈던 더위로 얼룩진 여행 경험은 치앙마이 사람들의 친절함,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물가, 젊은 예술가들이 그려낸 골목길의 벽화와 인테리어, 그리고 화창한 날씨로 객관화될 수도 있다.
그래선지 여행이 끝난 후 2주가량이 지난 지금에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놓친 다양한 모습의 치앙마이를.
방랑을 멈추고 그림자를 되찾을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할까? 과연 그런 곳이 있기나 할까? 나는 거기에서 받아들여질까? 요술 장화를 신고 영원히 떠돌아다니는 슐레밀,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내 운명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삶은 과연 온당한가?
대학에 가기 전까지, 나는 항상 떠날 생각을 품고 있었다. 대구의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서울에서 좀 지내다가 외국 그 어느 나라든. 십여 년의 세월 동안 항상 떠나길 갈망하던 나는 잠깐잠깐의 시간 동안 여행을 떠날 때를 제외하곤 서울의 아주 작은 일부분인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
가끔씩 여행지에서 발칙한 생각을 해보곤 한다.
지금 내가 가진 (비록 보잘것없지만) 것들을 내려놓고 이곳으로 떠나와볼까? 그 삶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있을까? 새로운 사회에서 나는 받아들여질까? 결론은 항상 다시 제자리로, 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10대의 호기심 많던 소녀는 자기 자신이라 믿고 있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은 30대가 되어버렸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언제나 여행을 시작할 때면 그런 생각을 해본다.
예상치 못한 모든 여행의 끝엔 무엇이 남을까?
한바탕 꿈에서 깨고 나면, 거실 소파 위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엉덩이를 꼭 붙이고 있는 내가 남아있더라.
나는 늘 여행이 내게 무언가를 남기길 바랬나 보다. 어떠한 계기가 되었든, 여행이 나를 변화시키길 바랬나 보다.
중요한 건 내가 변해야 되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또 기대하고 바라본다. 다음 여행에서만큼은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