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 그런 사람이 되어주자
대학 다닐 때 만났던 남자친구는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불평이 많은 사람이었다. 힘들다는 투정을 내게 많이 했었는데, 아직 어리던 그 때 나는 그의 투정이 너무 귀찮고 싫었다. 처음에는 웃으며 위로도 해보고 받아주기도 했지만 계속 반복되자 나는 늘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라는 식으로 그를 대했다. 나도 미성숙하고 어렸고, 그 또한 너무 어렸지. 그걸 알지만 그 때의 기억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불평이 많은 사람, 투정을 많이 부리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게 됐다. 좀 묵직하고 책임감 있게 자기 일을 해내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 또한 웬만하면 누군가에게 ‘징징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지금의 남편은 힘들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어디가 아프다는 말은 자주 하지만....) 회사에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집에 와서 쏟아내지 않는다. 나를 위한 그의 배려다. 나도 처음에는 그냥 묵묵히 내가 해야할 일을 별 말 없이 해냈다. 별로 힘들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필요 이상으로 그에게 어리광을 부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면서 집안에서 해야할 일들은 두배 세배가 늘어났고, 괜히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내가 아무말 없이 해내니까 별로 안 힘든줄 아나?’ 싶어 생색 아닌 생색을 내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주절주절,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잘 해내고 있는게 무엇인지 주절주절, 나를 칭찬해달라고 나를 인정해달라고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내 나름대로 남편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그가 알아주기를 바랬다. 남편 퇴근 후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하는 아내는 나 밖에 없을 거라며 생색을 냈다. (최근 맹장염 수술을 받아 아기 목욕도 시키기 힘들어하는 남편...) 표현을 잘 못하는 남편이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일부러라도 수고했다, 힘들었지, 고생이 많아, 하며 한 마디씩 격려를 해주고는 한다.
잘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말다툼을 하거나, 좀 깊이 있게 대화를 할 때... 나는 남편의 무거운 어깨를 발견한다. 인풋(in-put)은 많은데 아웃풋(out-put)이 없다고 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담배를 피는 것도 아니고, 딱히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운동을 따로 하는 것도 아니고, 요새는 게임도 안 한지 오래고 거의 회사 아니면 집에만 있으니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다고 했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많고 집에 오면 반겨주는 아가와 아내가 너무 좋지만 마음껏 쉴 수도 없고 늘 뭔가 해야할 것이 있는 일상이라고. 우리 번갈아가며 하루씩 자유의 시간을 주자고 제안했다.
스트레스 뿐 아니라 남편에게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가장의 무게가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왜 그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하느냐고 자주 타박한다. 그런데 얼마 전, 맹장염 수술을하고 병원에 누워있으면서 ‘내가 혹시 아파서 이렇게 누워있게 되면 우리 가족은 누가 먹여살리나’ 하는 걱정이 들더란다. 막연한 두려움이다. 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지고 있다는 책임감, 부담감, 중압감...
가만히 생각하다 보니 남편이 너무 안쓰러웠다. 나는 남편이 집에 오면 핸드폰 하지 마라, 아기 좀 보고 있어라, 나 오늘 너무 힘들고 피곤하다, 잔소리와 푸념 일색이었는데.... 남편은 혼자 끙끙 앓으면서도 웃으려고, 더 사랑하려고 애쓰고 노력했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미안해졌다.
남편이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속으로 ‘또 아프대...’하면서 대꾸도 안하고 모른척 했었다. 내가 듣기 싫은 말, 쓸데 없다고 여겨지는 질문에는 그냥 대답도 안 하고 대꾸도 안하고 모른척 했었다. 그런데 남편이 어느 날 ‘뭘 묻는데 자꾸 대답을 안하고 동문서답 하니까 대화를 하기가 싫어져’라고 했다. 나는 쓸데 없다고 생각했던 질문이지만 남편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걸텐데...
남편만 바라보던 결혼 생활이, 아이가 생기면서 아이만 바라보게 되었다. 우리 부부 둘다 서로를 바라보기보다 아이만 바라보게 된다. 우리 두 사람은 이제 아이의 보호자로, 부모로, 조력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각자의 삶이 무겁다. 내가 힘든만큼 당신도 힘들 거라고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가 많다. 상대가 ‘나 힘들어’라고 얘기할 때... 나도 모르게 ‘당신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하지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내 편에게 ‘나 힘들어’라고 얘기할 수조차 없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남편이 힘들다고 얘기할 때 안아줘야겠다. 수고했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줘야겠다. 설령 내 마음에선 다른 말이 나올 것 같아도... 내 힘듦을 더 얘기하고 싶더라도... 한 템포만 쉬어가자. 그도 자신의 힘듦을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다. 마음 놓고 기댈 어깨가 필요한 사람이다. 언제나 내게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에게 한 번쯤은 내 어깨를 내어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커버사진 출처 Photo by Matthew Fassnacht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