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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금아 Nov 01. 2024

피아노가 있던 자리


 



돌아누운 등이 쓸쓸해 보였다.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은 옹색하기 그지없었다. 한때는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했던 피아노다. 아이들에게 맨 먼저 시킨 사교육이 피아노 레슨이었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연주 실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다. 


피아노는 식구들을 제 곁으로 불러 모았다. 집안 행사가 있을 때면 아이들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잘 못 하는 어른들도 합창을 했다. 피아노는 가구 역할도 대신했다. 여러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나 꽃도 피아노 위에 놓았다. 큰 가족사진도 피아노 옆 벽면에 걸었다. 그즈음에 유행하던 손뜨개를 배우려고 마음먹었던 것도 피아노를 덮을 레이스 보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자리가 그렇듯, 영원한 영화는 없는 모양이다. 재산 목록 1호나 다름없던 피아노도 시간이 흐르자 제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으니. 아이들이 다른 악기를 시작한 데다, 살림이 늘면서 이 방 저 방을 떠도는 애물단지 신세가 되었다. 이사할 때는 처분 대상 1호였지만 함께했던 추억 덕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마지막 자리는 안방 행거 아래 그늘진 곳이었다. 식구들도 더는 피아노를 기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악보를 올려놓는 보면대나 의자에 젖은 속옷이나 양말을 널어 말리는 공간으로 이용할 뿐이었다.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거실 중앙의 큰 소파가 그의 자리였다. 신문을 읽거나 티브이를 보고, 가족회의를 주재했던 곳이다. 아이들이 고3이었을 때도 큰 소리로 웃으며 코미디 프로를 보고, 밤새워 월드컵 축구 경기를 보며 소리를 질러대던 성역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그가 없다. 아침나절이면 망설망설 찾아온 여린 햇살이 엉거주춤거린다. 한낮이면 뙤약볕이 잔뜩 긴장한 채로 머물다 가고, 저녁이면 종일 자유롭게 펄럭이던 마른 옷가지들이 건조대에서 내려와 몸을 사린 채로 있다. 그의 전유물이던 텔레비전 리모컨은 옷가지 속에서 주인을 잃고 표류 중이다. 


남편이 은퇴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유일한 직장이었다. 정년을 채운 퇴직이었지만 충격이 컸다. 출전 정지를 당한 것 같았다. 신체 나이가 50대 초반인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 년 전에 마라톤 대회에서 받아온 완주 기념 메달이 거실에 걸려 있는데 말이다. 32년 동안 뿌리내렸던 자리를 옮겼으니 몸살이 심할 것은 당연했다. 


길을 걷다가 우뚝 멈추는 습관이 생겼다. 매일 하던 산행도, 달리기도 뜨문뜨문해지더니 그조차 멈춰 버렸다. 은퇴의 충격은 남편을 방으로 밀어 넣었다. 은둔의 시작이었다. 그가 없는 빈자리가 그의 존재를 더 뚜렷하게 했다. 어느 날이었다. 침묵을 깨는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남편이 전화를 걸어 동네 문화원에 수강 신청을 하고,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순번을 확인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한 달이나 지났던가.


“띵…. 띠잉….” 


남편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무생물과 사람 사이에도 교감이 일어나는 걸까. 혼자 있기 위해 들어간 방에서 남편은 피아노를 만났을 거다. 의기소침해진 마음을 누구보다 먼저 헤아렸을 터. 동병상련의 애틋함이 그를 와락 끌어안기라도 했을까. 무뚝뚝한 남편도 도리 없이 몸을 내주었을 거다. 합방을 치른 그날 밤, 둘은 한몸이 되어 굳은 언약이라도 맺었음이 분명하다.


남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피아노를 연습 중이다. 건반의 자리를 익히며 새길을 건너는 법을 배운다.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길이 있을까. 어제는 오늘로, 오늘은 내일로 이어질 터. 은퇴 또한 지금껏 걸어온 길의 연장일 뿐, 끝이 아니다. 걷다 보면 여러 옥타브를 폴짝 뛰어오르기도 하고, 단번에 내려야 할 때도 있겠다.


여러 날째 단조로운 음이 반복되고 있다. 소심했던 피아노도 제법 소리를 높여간다. 꽁꽁 얼어붙었던 피아노의 마음도 봄눈처럼 녹고 있을 것 같다. 살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건반을 누르는 그의 손끝에서 막 번데기를 벗어난 호랑나비 한 마리가 젖은 날개를 퍼덕이며 몸을 가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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