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보다 깊이 누웠다. 물살을 가르던 꼬리도 지느러미도 고조곤히 접었다.
도다리쑥국을 끓이려고 도다리를 사러 갔다가 대나무 채반에 담긴 하이얀 가재미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삼십 마리쯤 되려나. 그곳 사람들이 ‘미주구리’라고 부르는 물가재미였다.
가재미를 손질하던 여인이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새빅에 잡은 기다예. 만 원에 가져가이쏘오.”
뼛속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은 한때 목숨이었던 것 같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내가 비싸다고 생각해서 망설이는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구워서 먹으면 고소하다며 대답도 듣기 전에 옆 채반에 담긴 것까지 담아 주었다.
“알배고 낳니라꼬 예비서 그렇지 꾸 무모 꼬시다예. ”
알을 품고 낳느라 살이 다 빠졌다는 말에 먹먹해졌다.
가재미를 좋아했다던 북방의 한 시인이 떠올랐다. 가재미와 함께라면 가난해도 서럽지 않고 외로워할 까닭도 없고 세상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을 것 같다던 시인이었다. 시간은 여든 해를 훌쩍 넘어 함흥 옛 시인의 방에 닿았다. 1936년 즈음이었나. 스물다섯의 백석이 서울을 떠나 영어 교사를 하러 함흥으로 갔던 때가.
어시장을 더 걸어 나오니 또 가재미가 보였다. 뼈째 먹어도 될 성싶은 작은 것들이었다. 장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홍합을 까던 할머니가 눈짓으로 플라스틱 채반 두 개를 가리켰다. 끝물이니 모두 팔천 원에 가져가란다. 조금 전에 들었던 “알배고 낳니라꼬 예비서…….”라던 말이 떠올라 할머니 무릎 앞에 있던 가재미들을 다 샀다.
서울 집에 와서 가재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식탁에 올랐다. 시퍼런 배춧잎 김치 두어 가닥 찢고, 구워서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다. 그렇게 먹다 보니 한 달가량 지나자 다 없어졌다. 가재미가 없으니 여간 허전하지 않았다. 동네 시장에도 가 보았지만 크고 넙데데한 모양새가 내 가재미와 달랐다. 어머니에게 가재미를 좀 사서 보내 달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며칠 새에 택배 상자가 오는데 소식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장에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쓸쓸해졌다. 어느 날 찾아온 벗이 며칠 푸근한 정을 풀어놓고는 온다 간다 말없이 홀연히 떠나버렸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두어 달 후, 초여름 무렵이었다. 친정에 볼일이 있었다. 그때까지 가재미를 잊지 못하던 나는 당장에 달려갔다. 다음날, 새벽 장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지만 볼 수 없었다. 아침밥을 먹고 다시 나가 찾아도 그리운 가재미는 만날 수 없었다.
장터 끄트머리에 어물 가게가 있었다. 들어가 가재미를 살 수 있냐고 물었더니 수입산뿐이란다. 순간, 함흥 시절 가재미를 사러 갔던 백석에게 어물전 주인이 했다던 말이 떠올랐다. 가재미는 음력 팔월 초상(初霜)이나 되어서야 온다던 말이었다. 수입 가재미를 권하는 주인에게 언제면 우리 바다 것을 살 수 있는지 물었다.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단다. 그제라야 봄에 낳은 알이 자라서 큰 고기가 되어 돌아온다고 했다. 그가 냉동고에서 뭉치 하나를 꺼내어 보였다. 식구들 먹이려고 얼려 둔 거라며 이거라도 가져가겠냐고 한다. 냉큼 받아 들고 보니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파장 무렵의 장터는 적적했다. 남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전을 걷지 못하는 여인네들과 조금이라도 금낮게 사려고 늦장을 보러 온 할머니들 몇뿐이었다. 작은 짐수레에 간신히 몸을 세운 할머니가 머리가 삼 바구니 같은 할머니에게서 생미역을 사서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실랑이 속에 미역 몇 오리가 두어 번, 상인의 고무 대야와 장바구니 사이를 오갔다. 곁에는 새우등을 한 할머니가 아직 팔지 못한 홍합을 까고 있었다. 홍합을 까는 손이나 미역값을 주고받는 손들이 마른나무이파리 같았다. 실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금방이라도 날려가 버릴 듯 가랑가랑했다. 생의 끄나풀을 붙잡느라 깔깔해진 손들이 영락없는 채반 속 가재미였다.
알배고 품어 바다로 보내느라 살이 빠지기는 가재미나 판장가의 아낙들이나 같아 보였다. 거친 파도에서 살아남느라 바다의 바닥만을 응시하다 외눈이 되어버린 가재미처럼, 어판장 바닥만을 바라느라 외눈박이가 된 그들이었다. 모든 욕구를 묻어버린 채로 판장 바닥에 붙어 자식들의 뼈와 살을 키워낸 한 마리 가재미였다. 포구만큼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거세되기를 강요당하는 곳이 있을까.
활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개가 건어물이었다. 그 흔하던 볼락도 노래미도 갯장어도 살아 팔딱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살이 통통 오른 물고기가 채반 가득히 놓이려면 뜨거운 여름을 지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에 아낙들은 빈 채반 너머로 넘실대는 하얀 파도를 보며 신산한 시간을 애애히 견디어내고 있었다.
장에서 돌아와 어물점에서 사 온 가재미를 옥상에 널었다. 한나절 볕에도 꾸덕꾸덕 잘도 말랐다. 해거름 녘이 되어 가재미로 저녁을 지었다. 어머니는, 봄 가재미는 구워서 간장에 찍어 조밥이랑 먹어야 맛있다고 했다. 차조를 씻어 밥솥에 안치고, 장독에서 어머니가 오래전에 담가둔 간장을 떠 실파 한 뿌리를 곱게 다지고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넣어 파간장을 만들었다.
밥이 뜸 들기를 기다려 가재미를 굽는다. 달구어진 팬에 눕히면 가재미는 고집이라고는 없다. 순하디 순하다. 순식간에 익은 가재미를 접시에 담아 머리를 떼고, 옆선을 따라 등줄기를 들어 올려 살살 살을 바른다. 발라낸 살점을 파간장에 찍어 조밥 위에 올려 드리니 자식 여섯을 낳아 품은 어머니가 가재미 같은 낯빛으로 이르신다.
“야아야, 니나 마이 무라. 내는 오래 살아서 너무 마이 뭇다.”
노랑노랑 가재미* 익는 소리에 하늘의 잔별들 죄다 밥상머리로 모여드는 푸릇한 저녁이다.
먼바다에서는 가재미가 돌아오고 있을 것이다.
*‘가자미’의 경상도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