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가파른 황톳길을 돌아 북녘을 향해 달린다. 시고모님과 함께 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다. 우리는 외투 차림으로 앉아서 가는데 고모님만 내가 골라 드린 삼베옷 한 벌 입고 누워서 간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이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가. 차에 앉은 사람들은 오감이 정지된 듯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누구 한 사람 차 앞을 가로지르는 이 없고,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지도 않는다. 풀어헤친 몸으로 누웠던 땅도 일어나 옷깃을 여민다.
생을 다하고서도 이루지 못한 귀향이었다. 평양이 고향인 고모님은 한국전쟁 때 남한으로 내려와 이승을 떠나던 날까지 타향에서 살았다. 열아홉에 결혼하여 시집에 들어가 살다가 친정 나들이를 갔던 길에 전쟁을 만났고, 혼자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금방이면 돌아갈 줄 알고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온 젖먹이까지, 북한에는 남편과 아들 넷이 있었다.
돈 모으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을까. 여러 일을 전전한 끝에 의류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한 푼 쓰기를 아꼈다.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집에서는 전깃불을 켜지 않고 살았다고 했다. 눈을 뜨면 해 뜨기를 기다렸고, 어두워지면 달빛에 의지해 생활할 정도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피난 나온 친오빠와 여동생, 사촌들을 서울에서 기적적으로 만났지만 기뻐했던 것도 잠시, 누구와도 정을 나누지 않고 살아 늘 외로웠다. 베푼 적이 없어 집안에서는 ‘스크루지 할머니’, ‘돈고(庫)지기’로 통했다.
그런 분이 그 많은 돈을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 운명하던 날에도 누군가에게 꿔준 돈을 받으러 나섰던 듯, 지갑에는 차용증이 들어 있었다. 고혈압으로 고생하면서도 대중교통만을 고집하더니 한파가 닥친 그 날 아침, 버스정류장에서 변을 당하고 말았다.
유품을 정리했다. 낡은 옷장에 손자국이 하얗게 엉켜 있었다. 문고리를 잡았다. 살아 숨 쉬는 내 지문이 고인의 지문과 겹쳐졌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은 그분과 나 사이에 새로운 유전자라도 생겨난 걸까. 시어른 안 계신 집안에서 큰 어른으로 모시지 못한 죄스러움에 젖었다. 서랍을 열었다. 군데군데 꿰맨 나일론 양말과 삭아 나달나달해진 속옷, 빛바랜 초록 새마을 모자‧‧‧‧‧‧. 속절없이 해져버린 고모님의 시간이 더는 덧대어 기울 수 없는 몇 점 사그랑이로 남아 있었다.
저무는 해가 열린 문틈으로 방 안을 기웃거렸다. 가던 길을 되돌아왔을까. 급히 떠나느라 미처 챙겨 가지 못한 뭔가를 찾고 있는 고모님의 몸짓 같았다. 햇살이 달려가 윗목 구석진 자리를 비추었다. 두툼한 수첩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검은색 겉표지에서 ‘入出金 帳簿(입출금 장부)’라고 찍힌 금박 글씨가 반짝였다.
고모님의 나날은 숫자로 이어져 있었다. 빼곡히 써 내려간 입출금의 기록이 아라비아 숫자로 쓴 일기(日記) 같았다. 돈이 흘러간 곳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의 향방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한 줄 한 줄을 톺아 돈이 나간 곳을 살폈다. 대부분이 입금의 기록이고 출금이라고는 가물에 콩 나듯 했다. 교회에 내는 헌금과 각종 세금, 공과금, 생필품 비용이 거의 다였다. 그 흔한 외식비나 목욕비는커녕, 병원비나 약값에 쓴 돈조차 찾기 어려웠다. 경조사비도 없었다. 마음을 열어 주지 않는 숫자들이 생전의 고모님처럼 과묵했다.
장부를 덮으려고 할 때였다. 마지막 칸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준섭이 생일상 87,000원’
운명하기 전날의 기록이었다. 준섭이는 고향에 두고 온 고모님의 큰아들이라고 들었다. 기억이 미치자 숫자들의 속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언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페이지를 거꾸로 넘기며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참 걸려 두 줄의 출금 내용을 더 찾아냈다. ‘정섭이 생일상 72,000원’ ‘기섭이 생일 61,000원’ 다른 아들들의 이름 같았다. 어떤 기호가 그보다 더 많은 은유를 담아낼 수 있을까. 마주하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그분의 마음자리가 만져졌다. 얼마나 시렸을까.
고모님의 시간은 오래전에 멈춰버린 듯했다. 북녘땅을 떠나올 때의 나이, 서른셋에 머물러 있었다. 고향에 두고 온 자식들은 노모의 기억 속에서 아직도, 한시 빨리 달려가 돌보아야 할 어린아이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빈손이었던 재산은 부엉이살림처럼 늘어 큰 부자가 되었지만, 방 안엔 번듯한 가구 하나 없었다. 행랑살이하듯 이불장과 서랍장, 작은 나무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부엌살림이라야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소형 냉장고, 솥단지와 사기그릇 몇 개, 수저 몇 벌뿐이었다. 그조차 제자리에 부려놓은 적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어딘가를 향해 달려갈 기세로 놓여 있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 메지메지 싸 놓은 크고 작은 보퉁이들도 때가 되면 서둘러 이고 지고서 고향 집으로 가져갈 것들이었다. 언제 한 번 두 발 쭉 뻗고 속잠 든 적 있었을까. 남한으로 내려온 후로 고모님의 삶은 내내 드난살이였으리라.
해가 갈수록 고모님은 초조해졌다.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물고‧‧‧‧‧‧. 팔순 고개를 넘을 때는 오래도록 살아온 강남 집을 팔고, 경기 북부의 큰 산자락 아래로 이사했다. 고향 쪽으로 한 발치라도 더 다가서고 싶었을 거다. 남쪽을 향한 안방 대신, 북으로 난 작은 방에 머물면서 한겨울에도 창문을 열어두었다고 했다.
장부를 덮었다. 운명하던 날 아침에 큰아들의 생일상을 차리던 어미의 심정이 그랬을까. 겉장에 머무는 볕뉘 한 조각이 너절하게 닳은 낱장처럼 서러웠다. 냉장고에는 주인공 없는 생일상에 올렸을 녹두빈대떡과 소갈비찜, 왕만둣국이 있었다. 어미란 본디부터, 깊은 골짜기에서 솟아오르는 원시적 사랑의 물줄기를 아래로 쏟아붓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으면 불어난 물이 살 속으로 역류해서 심장을 멎게 한다. 짐작했던 대로 사인(死因)은 ‘심장 마비’였다.
집 안에서는 위령제가 열리고 있었다. 교회를 다녔던 큰고모님과 종교가 달라 뒤틀어진 서랍처럼 늘 아근바근했던 작은고모님이 마지막 길 떠나는 혈육에게 올리는 화해의 제사였다. 무녀가 이 방 저 방을 돌며 외쳤다.
“돈! 돈! 내 돈!”
무녀의 손에서 대나무 가지가 산파래 떨 듯했다. 작은고모님이 고사상에 놓여 있던 만 원권 지폐 묶음을 가져와 무녀 앞에 내밀었다.
“온니, 돈 여기 있어. 다 가져가라. 온니, 잘 가라.”
금세라도 울음이 터질 듯했다. 남한 땅에서는 하나밖에 없던 동생이었지만 부자 언니에게 쌀 한 됫박, 연탄 한 장 속 편히 얻어 쓰지 못한 애증이 섞여 있었다. 다른 이들도 저마다의 회한에 잠기는 것 같았다. 큰고모님뿐, 북에서 온 친척 모두 잘살지 못했다. 어려울 때마다 망자를 찾아 도움을 청했지만, 거절만 당했으니 소원해질 뿐이었다. 큰고모님은 점점 더 외로워졌다. 그럴수록 마음은 북녘을 향해 달렸을 것이다. 남은 자들의 마음을 읽었을까. 무녀가 뜀질을 멈추고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먼 데 있는 자식 보러 갈 때 쓰려고 모았는데‧‧‧‧‧‧.”
살아 못다 한 망자의 이야기가 흐느낌이 되어 무녀의 입으로 새어 나왔다.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저마다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씩을 꺼내놓았다. 나는 고사상에서 국화꽃 한 송이를 집어 창가에 올려두었을 뿐이다. 그때였다. 열린 창으로 갑자기 북풍이 불어쳤다. 돈이 날리고, 창이 덜컹거렸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방 안은 사람들의 흐느낌과 무녀의 통곡 소리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죽음에도 힘이 있는 것일까. 산 자와 죽은 자의 몸속에서 날을 세우고 있던 상처들이 서로를 보듬고 있었다. 고모님이 돈 버는 일에 왜 그토록 집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린 자식을 뗴어놓고 온 자신에 대한 가혹한 체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겨두고 온 자식을 만나러 갈 여비를 마련하는 여인을 어찌 수전노라 할 수 있으랴. 그런데 평생 모은 돈으로도 갈 수 없으니 그곳은 얼마나 먼 땅인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두꺼운 옷 한 벌 없는 고모님은 하필이면 왜, 햇살도 여린 이 초겨울 날 베옷 한 벌만 걸치고서 먼 길을 떠났을까? 북창 너머로 어린것이 있는 집을 향해 바삐 걸어가는 고모님의 시린 옷자락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