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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엄의 불가침 Aug 01. 2024

농촌으로 유학 온 고3엄마 #1

죽음의 공포

 매년 12월 초면 친정집에 모여 김장을 한다. 일 년 먹을 배추김치를 담그는 일은 나를 포함해 언니들과 동생들도 함께하는 큰 행사이다. 주말을 이용해 김장을 해야 하니 시간을 아끼기 위해 부모님께서는 백 포기가 넘는 배추를 미리 밭에서 수확해 소금에 절구고 씻어놓는다. 그런데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배추를 밭에서 수확하고, 소금에 절구고 씻는 과정이 얼마나 사람의 진을 빼는 작업인지. 몇 년 동안 그렇게 금요일 밤에 김제에 내려가면 잘 절여진 속살이 노란 배추가 질서 정연하게 놓여있었고, 우린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때가 되면 배추들이 스스로 밭에서 걸어 나와 소금을 묻히고, 다시 물속에서 자신의 몸을 정갈하게 했을까마는 나는 배추가 거기까지 와 있는 과정이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일이 너무 힘들어 더는 김장을 못하겠다는 팔순을 넘긴 아빠의 절규를 하소연쯤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사람을 사서 하시라고 했다. 농촌에서 일손을 구하는 것이 많은 배추를 절이는 것 이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그땐 몰랐던 것이다.


 여태껏 보다 덜 힘들게 배추를 절일 다른 좋은 방법을 찾진 못했지만, 아빠는 때가 되면 배추를 심었다. 그리고 한번 심어진 배추는 철없이 잘 자랐다. 스스로 걸어 나와 소금에서 뒹굴 줄은 몰랐지만,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그 부지런함에 화답할 줄은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김장 때가 되었고,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일주일째 음식을 거의 입에도 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인지 장애로 몇 년 전부터 단기기억을 못 하시긴 하지만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식사를 못하신다고 하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급하게 나는 휴가를 내서 목요일 밤에 김제에 갔다. 그 밤에 본 엄마 아빠의 얼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까지도 유령처럼 변해있었다. 한 달은 족히 굶은 것같이 눈까지 퀭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보며 섬뜩한 공포가 느껴졌다. 이러다간 일 년은커녕 얼마 못 가 부모님을 영영 못 볼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 와중에도 수돗가에는 통통하게 살찐 배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배추들은 서로 질세라 야윈 두 분이 자기들을 옮기느라 얼마나 사투를 벌였는지 알려주려는 듯 들쑥날쑥 소란스러웠다.


 이때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부모님 곁으로 와야겠다는 이제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결의(決意) 같은 게 생겼다. 그러고 나서 숙명처럼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농촌유학이었다. 나는 이렇게 계획하지 않은 순간에 어디선가 나에게 날아온 화살을 맞으면, 그 일에 모조리 마음을 내어주고 만다. 특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휩쓸 때는 그것을 피해 지금의 공간이 아닌 다른 공간을 꿈꿨다. 대학졸업 후 처음 입사했던 회사에서 월, , , , , , 으로 휴일근무와 야근이 일상이던 어느 날 이렇게 일만 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가족 모두 아까워하는 회사에 한 톨의 미련도 없이 사표를 던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족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도한 공간은 한국사람은커녕 동양사람 하나 없는 아일랜드(IRELAND)의 시골마을이었다. 그곳의 자연은 지친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최고의 선물이었지만, 돌아온 한국은 또 다른 시련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자체를 거부당하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했고, 한국에 있으면 내가 나를 파괴할 수도 있을거 같은 두려움에 추운 겨울 더 추운 북해도로 떠나버렸다.


전북농촌유학 사이트의 메인화면


 농촌유학을 신청하는 기간도 몰랐고 어디서 신청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나는 혼자서 농촌유학을 결정했고, 김장을 마치고 올라오는 차 안에서 선언해 버렸다. 그때 신랑은 사전에 그 어떤 의논도 없이 언니네도 같이 타고 있는 차 안에서 맥락 없이 꺼낸 농촌유학에 대해 놀라고 황당해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마음이 폭주를 일으켜 내 눈과 귀를 다 막아버린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중에라도 신랑과 아이들에게 동의를 구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은 미뤄둔 채 어느 곳으로 농촌유학을 신청할지, 절차는 어떻게 되는지 찾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런 나를 지켜보던 신랑은 나에게 적잖은 배신감을 느꼈을 테지만, 올해 고3이 되는 딸아이의 돌봄에 대한 걱정으로 자신의 의사를 완곡하게 전했다. 나는 신랑의 걱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직면해서 의논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신랑의 반대가 두려웠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늘 나는 도망쳐버렸다. 그런 나로 인해 신랑은 지금껏 나와 의논다운 의논을 할 기회가 없었다.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신랑과는 반대로 거절감에 취약하고, 잘 다룰 줄 모르는 나는 이번일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족들의 반대에 맞설 용기가 없어 계속 피했지만, 아무리 도망가봤자 농촌유학 신청마감일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힐 뿐이었다. 결국 난 농촌유학을 가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본 후, 마감일을 겨우 며칠 앞두고 다음 세 가지로 가족들과 대화 비슷한 걸 했다.

첫째 15년 가까이 쉬지 않고 일 한 나에게 보상으로 일 년 동안 안식년을 주고 싶다.(이때까진 회사를 그만둘 작정이었다.)

둘째 올해 6학년이 되는 아들에게 사람이 별로 없는 시골에서 일 년 동안 존재를 환대받게 해 주고 싶다.(고학년이 되면서 학업에 부담이 컸던 아들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지쳐있었기 때문에 농촌유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또한 아들을 꼼꼼하게 관찰해서 최고의 맞춤형 지도를 해주셨던 5학년 담임선생님께서도 작은 학교를 권하셨다.)

셋째 건강이 많이 안 좋은 친정부모님을 일 년 동안 가까이에서 돕고 싶다.


 내가 일을 쉬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일치감치부터 신랑은 회사를 쉬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은 농촌까지 가서 쉬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게다가 둘째만 데리고 농촌으로 가면 첫째인 딸아이는 누가 돌보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형평성에 어긋난다고도 했다. 딸아이가 6학년일 땐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대답했다. 그래서 더 가고 싶은 거라고. 첫째 때 못해줘서 후회가 되니, 둘째는 꼭 해주고 싶다고. 그리고 첫째는 새로 옮긴 학교(이 무렵 딸은 일반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대안학교에 등록을 한 상태였다.)에 기숙사를 신청해 둔 상태였기 때문에 기숙사에 가 있게 되면 크게 내 손이 필요 없지 않겠냐고.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보살피는 문제에 대해선 오랜 숙원사업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결핍, 남동생과의 차별로 인해 차곡차곡 쌓여있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을 해결하고 싶다고 했다. 부모에 대한 원망을 얘기하면서 또 가까이 가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건 무슨 궤변같이 들렸겠지만, 정말 이 두 가지 마음이 모두 내 진심이었다. 내 안에는 부모에 대한 책임감과 자라지 못한 내면아이(과거에 마음에 상처 입었던 경험들이 치유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처받은 그 시절에 멈춰버린 심리상태)에 대한 자책감이 동시에 공존하면서 호시탐탐 영역을 넓히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형상이었다.


 모든 건 때가 있는 법이다. 뒤늦게 신청마감일에 쫓겨 겨우겨우 입을 뗀 나는 신랑과 아이들의 마음에 남아있는 앙금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천만 다행히 신랑과 아이들은 크게 반대는 하지 않았고, 그것에 미안한 나는 일단 신청만 해보겠다고 했다. 있는 그대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설명했다면 가족들은 기꺼이 지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나는 참으로 지질하게 가족들에게 선심 쓰듯 신청해도 떨어질 수 있음을 은근히 내비쳐가며, 가족들을 위한 창문하나쯤은 열어놓았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찾고 또 찾았다.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해 심사숙고한 후, 친정집과는 30분 거리이고 우리 집과도 비교적 가까운 군산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 1차 신청을 했다. 하지만 두 가정 모집에 많은 가정이 신청하는 바람에 다자녀 우선에서 밀려 탈락했다. 이때  나는 크게 실망했지만 쉽게 포기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족들의 눈치를 보면서 2차를 기다렸다가, 정읍에 있는 한 학교에 다시 신청서를 냈다. 이곳은 한 가정만 모집했기 때문에 1차 때보다 더 불리했다. 그런데도 왠지 운이 도와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과는 두 가정이 신청했고, 또다시 다자녀 우선에 밀려 탈락.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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