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실패로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결국 안 되는 거였나 보다. 상심이 컸다.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거란 근거는 없지만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기대도 했고 혼자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서 마음은 벌써 농촌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떠난 마음을 어디쯤에서 찾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나의 실패는 가족들의 안도이고 기쁨일 테니 절반의 실패란 생각으로 억지 위안을 삼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끝이 났다면 말이다.
이미 마음을 접고 없었던 일인 양 애쓰고 있었는데 2차로 신청한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급하게 체류가능한 집을 하나 발굴했다고 한다. 그러니 정해진 기간 안에 내려와서 그 집을 보고 최종신청 여부를 알려달라고 했다. 정말 다시 기회가 주어진 것인지 실감이 안 났다. 이미 다 끝났다고 신랑에게 얘기했는데 번복하는 구차함을 감수해야 했다. 나랑 아들만 체류할 집과 학교를 사전방문하겠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이 컸으므로 신랑에게 서비스를 부탁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신랑은 이토록 자신의 욕구조차 직접 말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공기(空氣)로 겨우 전하는 내가 불쌍했는지 휴가를 내서 함께 가주었다.
아이는 선생님들과 면담을 했고 우리는 교장선생님께 설명을 들었다. 두 손 가득 선물과 과자를 받아 든 아들은 이미 마음을 굳힌 거 같았다. 이제 우리 부부만 결정하면 되는 거였다. 신랑도 이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이곳은 체류할 집이 두 개이고 농촌유학을 신청한 가구도 두 가구이지만, 다자녀 가족에게 우선권이 있기 때문에 어차피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체류할 집을 두 집 모두 볼 수는 있었다. 첫 번째 집은 새집은 아니었으나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으로 안전이나 위생면에서 좋아 보였다. 두 번째 집은 할머니 혼자 사시다가 요양원에 가시게 되어 비어있는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딱 시골스런 그런 집으로 여러 문으로 집에 들어갈 수 있어 방범도 걱정이 되고, 화장실도 뒤쪽에 있어 어른인 나는 괜찮아도 아들은 무서워서 싫어할 구조였다. 그러나 이토록 수용이 어려워 보이는 부정적인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잘 볼 수 없는 흙마당을 보는 순간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향수가 스멀스멀 올라와 정원에 심어진 커다란 소나무와 노닐고 있는 게 아닌가!
사전 방문이 있은 후 나는 머릿속으로 백번도 넘게 두 번째 집을 이렇게 저렇게 고쳐보려고 애를 썼다. 주인만 허락한다면 내가 손수 고쳐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사실 그 집을 그대로 두고 생활하기에는 너무 힘들 거 같았다. 화장실이 가장 큰 문제였고 그다음이 난방과 안전. 한 번도 집을 고쳐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든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구글에서 로드뷰를 보고 또 보면서 상상 속에선 이미 마당 가득 해바라기를 심었고 집 구석구석 리모델링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아들이 두 번째 집에서 사는 건 무서워서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마당 가득한 해바라기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비밀의 정원에 가득 피어있는 해바라기
세 번의 실패로 해질 대로 해진 마음을 겨우 붙잡고 있는 나에게 최종 신청서 마감일 다음날 아침 일찍 전북 교육청의 농촌유학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체류지 답사까지 마쳤는데 최종 신청서를 내지 않은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적절한 체류지를 준비해주지 못한 교육청을 탓하는 것으로 소심한 복수를 했다. 그러면서도 한가닥 미련이 남아 다자녀 가정이 최종신청서를 냈는지 물었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아무도 최종신청서를 내지 않았다는 답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서 축포가 터졌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정읍으로 농촌유학을 오게 되었다.
농촌유학을 결정하고 나서 바로 회사에 2월까지만 근무하겠다고 얘길 했다. 15년 가까이 회사가 어려울 때도 계약직인 나를 내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육아로 힘겨워할 때도 내 개인 사정을 많이 봐준 고마운 회사인지라, 일을 그만둔다고 얘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도 나를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고, 좋은 조건으로 재택근무를 제안했다. 한 달에 한번 첫 번째 영업일에 서울로 출근하고, 나머지는 전화로 일처리를 하는 것으로 잠정적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농촌유학을 가는 첫 번째 이유인 나를 위한 안식년은 이렇게 50프로짜리가 되었다. 세상일이 맘먹은 대로 되면 무슨 재미가 있으랴.
드디어 3월 2일 정읍으로 이사를 했고, 이틀 만에 한 달에 한번 서울로 출근하는 날이 돼버렸다. 아침 일찍 아들은 혼자 셔틀을 타고 새 학교에 첫 등교를 했고, 나는 출근을 위해 근처 신태인역으로 갔다. 신태인역에 차를 두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일을 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방과 후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주인집에 부탁을 했다. 신태인역에 돌아왔을 때 이미 시간은 저녁 10시가 다 되었고, 주변은 어두웠다.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마을은 어둠 그 자체였다. 난생처음 이토록 어둡고 낯선 길을 운전하는 나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무섭고 긴장되었다. 밤에 운전할 때는 차가 하나라도 있는 게 좋다는 걸 처음 경험할 정도이니 오죽했을까. 신태인역에서 집까지는 약 10킬로 미터정도인데 가는 내내 길에는 자동차 한 대가 없었다. 편도 2차선 길은 그나마 일직선에 가까워서 무섭긴 해도 운전을 할 만했다. 하지만 마을 어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편도 1차선의 꼬부라진 길에다 주변은 더 어두웠다. 이미 등골은 서늘해졌고 운전하는 내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그동안 농촌유학을 꿈꾸던 내 머릿속에는 온통 해바라기정원만 있었나 보다. 단 이틀 만에 이토록 거대한 귀곡산장을 맞닥뜨릴 줄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이제 집까지는 1킬로미터정도 남았다. 이때부터는 외길로 산길을 구불구불 돌아가야 하는데, 이런 곳에 사람이 살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 거짓말처럼 백설공주가 숲 속에서 만났을법한 아주 작은 마을이 나온다. 아침에 그 길을 나올 때 최대한 길 형태를 익혀두었지만, 이미 그 기억은 공포의 먹잇감으로 자진상납해 버렸다. 가로등이 없는 산길, 칠흑같이 어둡다는 표현이 이런 걸 두고 하는구나 싶었다. 더 이상 쪼그라들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진 심장으로 태초의 어둠을 향해 가는 억겁의 시간이었다.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상향등 켜는 것도 잊었을까. 그렇게 운전대와 한 몸이 되어 갈 때쯤
갑자기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차 왼편으로 휙 하고 지나가는 게 아니겠는가.
순간 숨이 멎어버렸다. 온몸에전율이 일었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으로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만 애타게 기다릴 아들이 떠올라서, 놓고 있던 정신줄 끄트머리를 겨우 붙잡았다.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더 세게 잡았고, 미친 듯 날뛰고 있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달래며 간신히 사이드미러를 흘깃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