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귀신을 만났다고 아들에게 얘기한 후로 아들은 그 길 언저리에만 가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조금 있으면 처녀귀신을 또 만나겠네?!'
'처녀귀신은 잘 있을까?'
'귀신은 사람을 못 죽인대. 왜냐고? 사람을 죽여 귀신이 되면 서로 얼마나 민망하겠어?'
라는 말들을 쏟아내며 히죽거린다. 한 지인은 나와 통화할 때 처녀귀신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놀리기도 했다. 전봇대 처녀귀신을 그렇게 극적으로 만난 후(친절한 방법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들어낼 수 없으니 어찌하리오!) 비록 통성명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언제고 귀신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그 길을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 길을 돌아가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도 같고, 향기롭고 하늘하늘한 들꽃들이 가득 피어있는 정원이 있을 것도 같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오란 해바라기가 태양보다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을 것만 같은 오만가지 상상을 하느라 바빠진다. 큰 딸이 처음으로 정읍에 왔을 때 그 길을 가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던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비밀의 정원이란 별칭을 붙여주었다. 그 길을 돌아가면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정원이 있을 것만 같다고 했다.
3월 8일 데크에 하얗게 내린 서리
3월 19일 자태를 뽐내는 수선화
3월 21일 맑은 날씨
3월 27일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안개
그 길엔 또 하나의 주인이 있다. 바로 우유와 치즈라 이름 붙여진 길강아지들이다. 아니 들에서 살고 있으니 '들강아지'가 맞을 듯도 하다. 아들이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친해진 아이는 우리가 임대한 집주인 딸이다. 유나(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가명을 쓴다)는 초등학교 2학년으로 아주 활발하고 생기 넘치는 아이다. 아들과 함께 도롱뇽을 관찰하려 가기도 하고, 전봇대 귀신과 이웃해 살고 있는 우유와 치즈에게 밥을 주러 가기도 했다. 우유와 치즈는 유나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다. 둘 다 하얀 강아지인데 아마도 형제인듯하다. 둘 중 덜 하얀 녀석이 치즈이고 더 하얀 녀석이 우유라고 했다. 나는 아무리 보아도 구분이 잘 안 되는데 아이들은 잘도 구분했다. 아들과 유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자전거를 타고 가서 우유와 치즈에게 밥을 주고, 전봇대 귀신에게 살짝 알은체를 하고 돌아왔다.
지난겨울에 태어났다는 우유와 치즈
아들은 우유와 치즈를 데려와 집에서 키우자고 했다. 고양시에 살 때도 아들은 곧잘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했다. 아들뿐 아니라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자고 성화였으나 나는 '사람 말고는 안 키운다'는 나름의 신조가 있어 단칼에 거절하곤 했다. 이번에도 안된다고 했더니 아들은 나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엄마'라고 했다. 사실 나는 개나 고양이가 무섭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면 자동으로 추가될 무수한 내 일거리도 싫었지만, 그것보다 존재 자체가 무섭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엔 집집마다 개를 키우고 있었다. 그 개들은 집을 지키는 용도였으므로 사람이 나타나면 무섭게 짖어댔다. 더 사납게 때론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짖어대는 개일수록 일을 잘하는 개이고, 쓸모 있는 개였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개나 고양이가 둘도 없는 좋은 친구이자 자기편이어서 거부감은커녕 사람보다 가까이하는 동물이지만, 나는 그런 시대보다 훨씬 야생적인 시대에 태어났고 살아냈다. 그때의 나에게 개는 언제든지 달려들어 내 살을 물어뜯고야 말 것 같은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런 나에게서 한 발짝도 빠져나오지 못한 모양만 어른으로 예기치 않게 우유와 치즈를 만난 것이다. 그러니 우유와 치즈도 처음부터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밥을 가져다줄 때 나는 함께 가지 않았다.
한 번은 아들과 둘이서 산책을 하는데 우유와 치즈가 저만치서 아들을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멈춰 섰고, 아들은 뛰어가 우유와 치즈에게 손을 내밀었고, 강아지들은 아들 손을 핥아주었다. 신기하게도 우유와 치즈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전혀 짖지 않았다. 낯선 이를 만나면 짖는 게 강아지들의 숙명이라고 알고 있던 나의 고정관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유와 치즈는 생김새가 강아지보다는 여우랑 비슷하게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주 김제에 오갈 때마다 차 안에서 반갑게 꼬리 치며 달려오는 우유와 치즈를 만났다. 차 안이라 그랬는지 여우와 비슷한 생김새로 인해 여우처럼 느껴졌던지 어느 날부터 아들에게 우유와 치즈를 만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꺼내고 있질 않는가. 그러다 아들과 둘이 우유와 치즈의 밥을 들고 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근처까지만 갔고 차마 우유와 치즈에게 밥을 주는 것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아 아들에게 맡겼지만, 내가 강아지들 밥을 들고 갈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