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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엄의 불가침 Aug 22. 2024

농촌으로 유학 온 고3엄마 #4

손님

 우유와 치즈를 지속적으로 보살펴주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들과 의논을 했다. 아들은 이참에 데려다 키우자고 졸랐다. 그러나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으니 대신 매일 밥을 주러 가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한 번도 꿈꿔보지 못한 도그맘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아들에게 우유와 치즈가 강아지라기보단 여우에 가까워서 좋아하는 거라고 궁색한 설명을 했다. 내가 여우를 좋아하는 건 아들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기댄 것이다. 나는 부모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생명을 보면, 어릴 적 나를 보는 것 같아 눈에 밟히는 게 아닌가 싶다.

우유와 치즈와 아들


 아들은 매일 8시 20분에 학교 셔틀을 탔고, 저녁 5시가 다 되어서야 셔틀을 타고 집으로 왔다.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기존 학교보다 훨씬 길었기 때문에 아들은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게다가 방과 후 수업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싫어하는 수업도 참여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불평을 했다. 7명밖에 안 되는 반 친구들이지만, 자신만 모르는 친구이니 친해지려고 많은 에너지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기특하게도 학교와 친구들에게 적응하려고 애쓰며 평소에 보이던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특히 주인집 딸인 유나에게 최대한 맞춰주려고 스스로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면서, '성숙'은 이렇게 시련을 겪어야만 얻을 수 있는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는지.


 아들이 학교에 간 후 서둘러 집안 정리를 하고, 매주 두세 번씩 김제에 사시는 친정 부모님을 찾아간다.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로 오전에 가서 한두 가지 반찬을 만들어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고, 치매가 많이 진행된 엄마와 산책을 한다. 이때 엄마는 반드시 잊지 않고 무한반복의 레퍼토리를 시작한다. 그중에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할머니가 했다는 말씀이다. 아들만 일곱인 종갓집 큰아들에게 시집온 엄마가 내리 딸을 둘이나 낳고, 이어 내가 태어나자 못마땅했던 할머니는 태어난 아가의 성별을 묻는 옆집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 또 딸이어라. 남 부끄러워 밖엘 못 나가겠어라"

"네 할머니가 부끄러우면 애를 낳은 나는 어쨌겠냐"


 '그럼 나는 가족들을 한꺼번에 부끄럽게 만든 존재였나요? 우주보다 더 소중한 한 생명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는데, 온 마음을 다해 반겨주기는커녕 이렇게 무참히 그것도 반복적으로 부정해도 되는 건가요?'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던 마음을 얼마나 누르고 살았는지 모른다. 이 레퍼토리를 거짓말 보태서 천 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무한반복으로 듣지 않았으므로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그러나 이젠 매주 30번씩은 족히 들어야 하니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후벼 파지는 아픔을 참아내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하루는 엄마에게 정색을 하며 얘기했다.

"엄마, 다른 건 수백 번 들어도 괜찮은데 이 얘기만큼은 더 듣고 싶지 않아요. 엄마는 해산의 수고를 할머니한테 인정받지 못해 서럽고 억울하다는 의미로 하신 말씀인 거 백번 이해하는데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듣는 저는 그게 아니에요. 제 존재를 부끄럽다고 하시는 거 같아서 너무 속상하고 슬퍼요"

순간 엄마는 많이 놀란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셨다.

"그러냐? 그럼 앞으로는 안 하마"

그러나 나는 안다. 엄마는 다음번에도 이 이야기로 무한반복의 레퍼토리를 시작하실 거라는 것을. 엄마가 할머니에게 받은 시집살이 중에 가장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이 사건인걸 어쩌겠나!!! 엄마 마음에 대못으로 박힌 이 일은 치매라는 병을 매개 삼아 나에게 무수히 많은 화살을 반복해서 쏘아댈 것이다. 엄마는 환자이니 탓을 할 수도 없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이 화살들을 받아내야 할지 서러움이 밀려왔다.


 두 번째 레퍼토리는 큰아들에 대한 것이다. 엄마는 심적으로 물적으로 많은 자원을 큰아들에게 쏟아부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큰아들이 엄마에겐 아픈 손가락이다. 난 어릴 적 기억이 거의 없는데 희한하게도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세 살, 네 살 정도의 기억 중에 아주 선명한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남동생에게 젖을 먹이며 모로 누워 잠들어있는 엄마가 자는 동안 한 번이라도 내쪽을 쳐다봐줄까 엄마의 산성(山城)같이 높은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로로 눈물 흘리는 장면',  

'엄마가 남동생만 데리고 장터로 가는데 나도 가고 싶어 동구밖까지 울면서 따라가고, 엄마는 집으로 가라고 계속해서 다그치고, 나는 혼자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려 무섭기도 하고 돌아가는 길도 모르겠고 해서, 제발 데려가달라고 눈물콧물 범벅된 얼굴로 애원하는 장면',

'남동생만 챙기는 엄마에게 부정적 관심이라도 받고 싶어 울기 시작하면, 엄마는 내 고집을 고치겠다며 나를 안아 시커먼 돼지들이 꽥꽥거리는 돼지우리로 가서 나를 들어 돼지우리에 넣는 시늉을 하고, 울음을 안 그치면 돼지우리에 빠트리겠다고 위협할 때 극도로 무서워 발버둥 치는 장면'.

이 장면들은 조금씩 편집되어 간혹 꿈속에 나오기도 하고, 불쑥 내뱉은  엄마의 어떤 이 리모컨이 되어 내 머리속에서 재상영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남동생과의 차별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남동생이 태어나고 나는 온몸으로 차별을 겪어야만 했는데, 그런 나에게 엄마는 아픈 손가락인 큰아들의 걱정과 못 다해준 무언가를 미안해하는 이야기로 두 번째 무한반복을 이어간다.


 예상을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강도는 엄청났다. 엄마의 무한반복은 내 영혼을 우울하게 만들었고 더는 지속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겨우 한 달 만에 실패를 맛보면서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보다 절망이 더 컸다. 그래서 나는 늘 내 소식을 궁금해해 주고 매번 내편이 돼주는 일명 독수리5자매 단체 카톡방에 고백을 했다.

"너무 힘들어요~"

이 한마디에 그분들 중 두 분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에게 오는 KTX 기차표를 예매하셨다. 그렇게 가족을 제외하곤 첫 번째 손님이 오게 된 것이다. 나는 손님이란 단어를 아주 좋아한다. 아마도 내 마음속엔 누군가에게 환대받는 손님이고 싶은 욕구가 있나 보다. 오늘부터 나는 손님 맞을 준비로 내내 설렐 것이다.

 

난생처음 담아본 파김치(손님맞이용)




2024년 4월의 시작 정읍 비밀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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