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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엄의 불가침 Aug 28. 2024

농촌으로 유학 온 고3엄마 #6

안전

 언니들은 훈풍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녀들이 두고 간 따뜻한 바람이 벚꽃에 이어 지상에 존재하는 많은 꽃들을 일제히 피우는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작약, 모란, 꽃잔디, 수수꽃다리, 상사화(초록잎), 튜울립, 할미꽃, 연산홍, 철쭉, 조팝, 황매화, 옥매,,,,, 등등이 누가 누가 빨리 피는지 경쟁하듯 앞다투어 피고 있었다.


 재량휴일을 맞아 큰딸이 혼자 정읍을 방문하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오는 것이다. 이미 고3의 나이이니 혼자 못 올 일도 아니지만 혼자라는 단어는 나를 걱정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큰딸이 나를 밀어내던 때가 고1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것이 뭐가 있어?"

그날 나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고, 그 후로 내가 멀어지는 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했던 수많은 말들이 오히려 딸이 자신의 과업을 달성하는데 방해만 되었다는 걸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부모로부터의 정서적인 독립을 우린 '사춘기'라 부른다고 어떤 심리학자가 그랬던가. 나는 그때 딸의 사춘기를 이성적으로는 인정했지만, 심리적으론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그때 난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딸에게도 버림받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고1 여름방학땐 둘만의 여행을 제안했다. 내가 그토록 가고 싶던 '몽골에서 말타기' 여행이었다. 내 맘대로 9박 10일의 여행예약을 하고 딸에게 같이 가자고 사정사정했다. 그러나 딸에게서 돌아온 답은

"엄마랑 둘이서만 가는 여행은 불편해"였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매정하지 못한 딸은 마지못해 함께 가주었다. 나는 그때 속으로 너무나도 들떠서 몽골여행을 '아름다운 이별여행'이라고 혼자서 이름 붙이고, '사랑한 사람만이 이별도 한다'는 나만의 명언도 만들었다. 사실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이별 전에 며칠만이라도 딸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몽골에서 나는 딸의 모습 하나하나에 흡족해했고,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했다. 둘만의 여행도 처음이었고, 함께 말을 타는 건 하물며 드넓은 초원에서의 승마는 꿈을 꾸는 듯 환상적이었다. 고질적인 나의 저질 체력은 두고두고 옥에 티로 남아 딸의 핀잔을 들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테마가 있는 패키지여행이었으므로 각조로 나누어 다양한 이벤트가 있었다. 우리 조엔 시각 장애인 한분이 계셨는데, 말을 타면 자유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분의 보호자로 사위분이 같이 왔는데, 정말 묘한 편안함과 수용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딸을 아껴주었고, 따뜻한 말과 몸짓은 많은 사람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하게 만들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장인의 뒤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함께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잠시 휴식시간에 쉬고 있는 말들


 우리 조의 조장은 처음 만났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적질로 인사를 대신했기 때문에 딸과 나에게 '꼰대'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러나 9박 10일 동안 그분은 우리에게 평생 웃을 분량의 웃음을 웃게 만들어주었고, 특히나 딸과는 승마짝꿍이 되어 마지막까지 세심하게 챙겨주는 반전의 매력을 발산했다. 그분으로 인해 사람을 쉽게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기도 했다. 딸은 멤버 중에 스쿠터를 타고 직장에 출근하신다는 70대 할머니를 가장 좋아했다. 들판에서 올망졸망한 작은 들꽃들을 꺾어 예쁘게 꽃다발을 만드는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심 저걸 나에게 주겠지 하고 김칫국을 마셨으나, 예상을 뒤엎고 할머니에게 가져다주는 딸을 보며 서운함보다 대견함을 느꼈었다.  

몽골에서 같이 말을 탄 우리 조원들


 그때 만난 멋진 분들은 딸과 둘이서 대화할 때 불쑥불쑥 소재로 건져 올려져 보고 싶어 하던 참이라, 딸이 혼자 정읍에 온다고 했을 때 '그분들을 같이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언제든 연락하면 흔쾌히 만나줄 것 같은 분들이었기 때문에 딸에게 누굴 가장 만나고 싶냐고 물었더니 예상외의 답이 돌아왔다. 조장은 자기가 학교를 그만둔 사실에 대해 야단을 칠 거 같다며, 순창에서 한옥을 손수 짓고 계시는 이성기 님을 만나고 싶다 했다. 그분은 자신의 행동에 부정적인 판단보다는 응원을 해줄 것 같다고 했다. 몽골에서처럼. 이성기 님은 장성한 아들 두 분과 함께 여행에 참가한 영혼이 순수한 분이었다. 몽골에서 말을 타는 게 두 번째라고 했다. 젊은 시절엔 정치를 하기도 했지만, 그 후론 집을 짓는 사업을 한다고 했다. 지금은 사업을 아들들에게 물려주고 고향에서 직접 한옥을 짓고 있다는 최근 소식을 접했던 터라 딸과 함께 방문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옥정호수둘레 연두색이파리들이 앙증맞게 돋아나고 있는 벚나무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글쎄 산 정상에는 아직도 벚꽃이 줄을 지어 눈부시게 피어있는게 아닌가. 이미 벚꽃이 다 져버린 줄 알았던 우리는 잊고 있던 비상금을 다시 찾은 것마냥 흥분해서 '우와'를 연발했다. 오죽하면 감탄을 하다 하다 지쳐  딸이

"벚꽃에 한 맺힌 사람이 옥정호수가에 벚나무를 이리도 많이 심은 거 아닐까?"

라고 했다.

부부가 손수 짓고 있는 한옥

 음주가 금지되어 있던 규칙을 뒤로하고 몰래 소주를 한잔씩 돌리며 개구지게 미소짓던 이성님을 소환하며 둘이 같이 웃었고, 시골마을에 짓고 있는 한옥은 어떤 모습일지 딸과 즐거운 상상을 했다. 순창까지 가는 길은 굽이굽이 어려운 산길이었지만, 딸과 함께인데다 가는 곳마다 피어있꽃들에 취해 기분이 붕 떠서 운전은 저절로 되었다.


 딸이 일반학교를 그만두기까지 구구절절 사연이 수십 트럭은 넘을 테지만, 이성기 님은 그 사연을 미리 판단하지 않고 물어봐줬다. 딸은 지금의 학교생활이 행복하다고 대답했고,

"대한민국에서 고3이 행복하다니 기적이야"

라는 감동의 언어로 딸의 존재를 온 마음을 다해 환대해 주었다. 또한 자신이 짓고 있는 보금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사소한 것까지도 빠짐없이 소개해주었고, 한옥에 대해 숨겨진 이야기들까지 다정하고도 재미있게 나눠 주었다. 아직은 미완으로 사모님과 둘이서 손수 짓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다. 완성되면 꼭 다시 초대하겠다고 하면서 정리가 안된 집을 보여주는 걸 미안해했다. 사모님이 아침 일찍 우리에게 주려고 땄다는 두릅을 받아 들고 정읍으로 돌아오면서 부부가 자연과 한옥과 어쩜 저리도 닮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완성된 집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보고 질문 없이 미리 판단하는 것은 상대방을 숨 막히게 하고 마음을 닫아버리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지금은 딸을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내가 판단하지 않고 물어봐줄 때 딸은 안전하다고 느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딸이 이성기 님을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나도 안전한 엄마이고 싶다.  


2024년 4월의 중간쯤 정읍 비밀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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