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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엄의 불가침 Sep 02. 2024

농촌으로 유학 온 고3엄마 #8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고창 선운사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다. 궁금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하면 자세히 볼 수 있을까? 아무 때나 아무것이나 자세히 보이는 것일까?


 정읍에 와서 "엄마, 심심해~"를 연발하는 아들과 나는 아무 때나 아무 데를 간다. 동네 산엘 올라가기도 하고, 걸어서 학교까지 가다가 우유와 치즈를 보고 오기도 하고, 신태인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기도 한다. 그렇게 해도 시간이 남으면 집에서 뒹군다. 다시 근처 산에서 산딸기를 따먹기도 하고, 집 주변에 심어져 있는 보리수 열매를 따먹기도 하고, 뽕나무에서 오디를 따먹기도 한다. 블루베리 꽃이 블루베리 열매랑 똑같이 생긴 것도 그렇게 알게 되었고, 하얀 냉이 꽃이 만발해 있는 밭을 지나며, 내년에 저길 가면 냉이를 많이 캐겠구나 머릿속에 찜해놓기도 했다.


  아들은 처음 한 달 정도는 차를 타고 가다 5층짜리 빌라만 봐도 아파트라며 반가워했고, 어쩌다 낡은 건물에 PC방 간판을 봐도 가족을 상봉한 듯 신나 했다. 특히 작은 도시를 지나다 편의점이나 다이소를 보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우리 동네엔 편의점이 없다. 자전거를 타고 10분쯤 가면 면사무소 곁에 작은 농협 마트가 하나 있는 게 전부인데, 그것조차도 6시에 문을 닫고 빨간 날엔 모조리 쉰다. 그러니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그 마트에 가려면 여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임실 옥정호 출렁다리

  저녁을 먹고 아들과 둘이서 축구공을 챙겨 근처 공원에 가서 축구를 한다. 새로 만들어진 풋살장은 아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아들 전용인 셈이다. 아들이 공을 차고 내가 골키퍼를 하는데, 요 녀석이 일부러 내 몸을 향해 어찌나 세게 공을 차는지 온몸에 멍이 들어, 어느 날부터는 스멀스멀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워져 축구를 쉬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럼 아들과 진심으로 싸웠을 뻔.


 우리가 사는 정읍은 나에겐 참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김제를 왕복하는데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고 특별한 일이 있어 정읍시내를 가거나 전주 시내를 가도 한 시간 이내에 가능하다. 이곳에서 길이 막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하철로 평균 1시간은 족히 걸려야 출근을 하는 수도권에서의 삶은 어쩔 수 없이 타인과 지켜져야 할 개인 간 거리를 침범해 가며 많은 시간을 길거리에 상납해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시간이 늘 충분하다. 한 시간 이내에 바다를 보러 갈 수도 있고, 전북의 어떤 관광지를 가더라도 한 시간 정도면 된다. 전남의 유명한 관광지인 곡성이나 순천, 그리고 지리산 또한 2시간 이내에 갈 수 있으니 주말에 늦잠 자다 말고 아무 때나 둘이 맘이 동하면 그냥 길을 나선다.

정읍 무성서원
김제 원평 집강소

 무엇보다 좋은 건 작은 관광지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무성서원도 그렇고 원평 집강소도 그렇다. 문화 해설사의 시간에 맞춰 기다릴 필요 없이 언제든 귀한 해설을 들을 수 있으며, 우리만 원하면 몇 시간이고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무성서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의미 있는 곳인데, 다른 서원과 달리 평민과 여자들까지도 이곳에서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들의 기운을 받으려고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물렀다. 서원 자체도 자연을 그대로 살려 구불구불한 나무들로 지어져 있는데 참으로 아름답다. 이토록 멋진 곳이 가까운 곳에 있고 아무 때나 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 않은가?

작가의 눈엔 내가 이렇게 생겼나 보다(참 신기하게 생겼다)

 원평 집강소에서 나는 난생처음으로 화가에게서 초상화를 그렸다.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사람 많은 곳은 답답하고 힘들어서 늘 피하는지라, 한 번도 줄 서서 그림을 그릴 엄두를 못 냈었다. 그러나 여기선 그동안 못해본 것들을 아무런 부담 없이 해볼 수 있고, 어떨 땐 돈도 들지 않는 행운을 누린다. 동학혁명 때 '동록개'라는 백정 출신의 사람이 '누구나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달라'라고 자신의 집을 헌납했다고 한다. 그 집이 그 당시 집강소로 사용되었고, 현재도 이어져 풍물놀이, 마당극, 판소리 등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다양하게 열어 그분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 공연들은 무료로 진행되며 자연식으로 식사까지 대접해 준다. 바로 코 앞에서 공연자들의 숨소리까지 들으며 전통공연을 즐기다 보면 진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이런 경험은 수도권에선 돈 주고도 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귀한 경험인가. 동록개선생님도 하늘에서 흐뭇해하실 것만 같다.

남원 춘향제
정읍 피향정
변산 채석강

어느 날 하루종일 뒹굴다 갑자기 석양을 보러 가자고 나섰던 변산반도. 가는 길 내내 차들이 거의 없어 도로를 전세 낸 듯 거칠 것 없이 운전하면서 세금 내는 보람을 느꼈다. '고속도로'라는 말이 무색하게 수도권에서는 항상 차가 막히는 게 일상이었으니, 길에 차들이 없는 풍경이 이리도 감동적일 줄 어찌 알았겠는가. 석양은 아직이라 둘이서 열심히 갱이와 게들을 주워 담았고, 다음날 고급진 해물라면을 끓여 먹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해산물을 많이 먹고 자란 덕분에 비린네 나는 건 무엇이건 좋아한다. 내륙이 고향이지만 4대 독자이신 할아버지는 해산물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은 여름까지 젓갈일망정 해산물이 상에 안 오른 날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해산물 중에 특히 갈치를 좋아하셨다. 할아버지상에만 올라가는 갈치를 행여나 남기면 맛이라도 볼 수 있을까 침을 꼴딱꼴딱 삼켰지만, 돌아오는 건 어린 나를 약 올리는 구운 갈치 냄새뿐.

전주 한옥마을
진안 마이산

 지방엔 다양한 축제들이 열린다. 매주 열리는 축제를 미처 다 가볼 수가 없을 정도로 동시다발적으로 열려서, 아들과 의논해서 꼭 가보고 싶은 걸 고를 정도이다. 유명한 축제들은 사람이 많은 편인데 그래도 수도권에서 하는 행사들보다는 적고 주차도 그렇게 어렵진 않다. 그리고 집이 가까우니 늦게까지 있어도 별 부담이 없고, 가장 큰 장점은 돌아올 때 차가 막힐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지방 소멸이 가장 우려되는 지역이 전북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평소에는 사람 보기가 힘들다.


 대도시에서는 운전을 할 때 마음이 조급해지고, 미리부터 주차가 걱정되고, 늘 쫓기는 마음이었던 반면, 이곳에서는 길을 잘못 들어가도 마음 푹 놓고 수정을 할 수 있다. 뒤에 차가 있어도 빵빵거리지 않을뿐더러 대부분은 차가 없다. 운전대 잡고 자유를 느끼긴 농촌에 와서 처음이다.

"통제받거나 구속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시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

내 시간을 내 속도에 맞게 쓸 수 있다는 건 나에게 자율성이 확보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나의 존엄이 지켜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의 존엄이 지켜질 때 그때야 비로소 사물을 자세히 볼 준비가 된 상태가 아닐는지.

곡성 기차마을(무슨 소원을 빌었을꼬?)

 공간을 바꾼다는 건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다.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있는 곳이 다라고 생각하기 쉽고, 어떤 사안이든 납작한 평면으로 보기 쉽다. 이곳에서 우린 자주 떠나고, 어딜 가도 대부분 모르는 사람과 대화가 이어진다. 아들과 둘이서만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많고, 어떨 땐 아들에게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하드 사 먹으라고 주시는 할머니도 계신다. 마을에 대한 사연을 얘기해 주시는 분들도 있고, 농촌유학을 왔다고 하면 환영해 주며, 뭐라도 나눠주시려는 분들이 많다.

많은 사람이 촘촘히 붙어살아도 모두가 섬처럼 사는 도시와는 다르게 마을이 띄엄띄엄 떨어져 살아도 이곳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이웃사촌이란 느낌이 든다.   

이곳에 살면서 나는 '자세히 본다'는 것과 '입체적으로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배우는 중이다.

가는 곳마다 큰 딸은 동생의 점프샷을 찍어준다


2024년 5월 정읍 비밀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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