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의 생일을 맞아 아들과 둘이서 기차를 타고 고양시로 향했다. 매년 신랑 생일을 거창하게 챙겨준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없는 집에서 딸을 챙기느라 고군분투하는 신랑에게 손수 미역국이라도 끓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이때까진 아들이 기차 타는 걸 좋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했다. 늘 신랑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여행을 다녔던지라, 딱 한번 기차를 타본 아들이 KTX 타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도 있었다. 미리 김밥을 싸고, 아들이 좋아하는 음료수도 사서 나름 낭만적인 기차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서울에 도착했고 신랑은 용산역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런데 아빠차를 타고 집까지 가는 차 안에서 아들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엄마! 논이 보고 싶어"
"뭐라고?"
나는 뭔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고 다시 물었다.
"논이 보고 싶다고. 자연의 향기도 ~"
그제야 나는 무슨 말인 줄 알아들었다. 사실 나도 그랬다. 대도시에 살 때는 몰랐는데 정읍에 내려와 있은 후로, 한 달에 한번 일 때문에 서울에 갈 때마다 높은 건물들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빌딩들이 예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가만히 있는 건물들이 나를 위협하는 것 같았다. 높은 것도 숨 막히게 했지만 건물들이 너무 가깝게 붙어있는 것이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멀리를 볼 수 없다는 게 이토록 힘든 건지 처음 경험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그저 '위협적이다' 또는 '촘촘히 달라붙은 건물들이 나를 침범하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지만 아들은 '앞이 탁 트인 논이 보고 싶다'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아들은 4월 말 아빠 생일을 위한 상경 이후로는 다시 올라가는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우리보다는 신랑이나 딸아이가 틈이 나는 대로 정읍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아들이 보고 싶어 하는 논(우리는 이런 풍경을 보면서 숨통이 트이고 자유를 느끼나 보다)
지난주에도 신랑 혼자 정읍을 다녀갔다. 그리고 한주만에 또 정읍에 내려왔다. 아들이 보고 싶다던 그 논들 가운데서 열리는 '작은들판음악회'를 보러 온 것이다. 곡성에는 '미실란'이란 농업회사가 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농업박사님이 만든 회사로 이곳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음악회가 열린다. 그동안은 너무 멀어 엄두를 못 냈던 음악회였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정읍에 체류 중이니 이곳에서 곡성은 멀지 않은 곳이라 신랑과 같이 가려고 일주일 만에 다시 초청을 한 것이다. 딸도 같이 오길 바랐지만 학교 과제가 많아서 어렵다는 답변이 왔다. 그렇게 우리 셋은 곡성의 작은 들판음악회를 보러 갔다. 가는 길에 곡성 기차마을에 들러 한창 열리고 있는 장미축제에서 장미향기로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시간즈음에 저 멀리 섬진강을 베고 누운 들녘 한복판에 작은 폐교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미실란카페와 예쁜 책방이 사이좋게 모여있는 행사장에 도착했다.
미실란에서 운영하는 책방 들녘의 마음
'들녘의 마음'이란 책방이름이 참 서정적이고, 그 장소와도 잘 어울렸다. 그나저나 들녘의 마음은 어떤마음일런지!!! 팔고 있는 책들도 자연생태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고, 책방을 꾸미고 있는 소품들도 감성이 넘치는 것들로, 공간 자체가 주는 편안함과 포근함으로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주인장께서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고 즐기는지 예측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미실란카페에서 준비한 건강채식밥상
미실란카페에서 준비한 건강채식 밥상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하나같이 신선하고 엄선된 재료들이었다. 거기다 맛도 너무 좋아서 먹는 내내 호사를 누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내 몸이 넣어주는 음식에 만족해 나 스스로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들은 '풀떼기'만 준다고 살짝 불만이었지만 제법 잘 먹었다.
곡성에서 열린 작은들판음학회
드디어 들판음악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섬진강아름다운사람들'이라는통기타밴드가나와서 MSG 하나도 안친듯한 그러나 재료의 향은 살아있는나물 같은감성의노래를 들려주었다. 들판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아무리 뛰어난 무대감독이라도 이런 무대디자인을 만들어내지는못할 거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살짝살짝 흔들어 주는 나무들은 어느새 백댄서가 되어 노래의 흥을 돋워주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이어서 하모니카 연주로분위기가한층 고조되었고, 꽃분홍색 옷을 입고 나온 바이올린 연주자가옷 색깔만큼이나 강렬한 연주로 좌중을 압도했다.은은한 소나무와 찢어질듯한 바이올린은 이질적인데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이 모든 공연이 바로 코앞에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보일 듯 말 듯 저 멀리 무대에서 비현실적으로 연주되는 그런 공연이 아닌 것이다. 공연자들의 숨소리까지 느껴지고, 노래 부르는 가수의 침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바이올린을 켜고, 첼로를 켜고,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야외에서 공연을 본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들판에서 열리는 음악회는 지금까지 본 어떤 야외 음악회와는 차원이 달랐다. 사방이 트인 무대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이 그때그때 알아서 무대 배경이 되어주고, 효과음을 내주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음악회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자연'이라는 최고의 연출가가 만들어낸 유일한 작품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고, 밝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화려하지 않은 조명이 켜지고, 그로 인해 연주자들이 더 예뻐 보였다. 재치 넘치는 연주자들의 입담도 재미있었고, 수수하지만 각자의 색깔이 있는 그들의 사연들도 참으로 따뜻했다. 게다가 연주자들의 실력이 기대이상으로 훌륭했다. 귀가 예민한 신랑이라 보는 내내 만족하는지 어떤지 표정을 살폈다. 공연이 다 끝나고 신랑은 무척 좋아했으며, 가을에 있을 음악회에 꼭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좋은 공연 한번 보려고 미리부터 준비하고, 인터넷 예약을 위해 광클릭해야 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허무해지는 순간을 이곳에 와서 종종 경험한다. 작은 것에 대한 쓸모를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