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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엄의 불가침 Sep 26. 2024

농촌으로 유학 온 고3엄마 #15

딸에게 보내지 못한 손 편지

 사랑하는 딸에게


어버이날 네가 보내준 손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지금도 네 편지를 엄마 가방에 꽁꽁 숨겨 넣고 다녀. 부적처럼 말이야. 네 생각이 날 때나 보고 싶을 때 꺼내서 보면 그때마다 엄마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어떨 땐 울컥해지기도 해. 엄마는 세상에서 운이 제일 좋은 사람인가 봐. 이토록 사랑스러운 딸을 두었으니 말이야.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단다. 너를 딸로 가진 사람(세상 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이렇게 두부류 하하하.


 나에게 처음으로 엄마라는 역할을 부여했고, 엄마라는 정체성을 선물해 준 너.

자고 나면 머리가 놀라보게 자라서 엄마를 깜짝 놀라게 했고,

어느 날 까르르 소리 내어 웃어 아가가 처음부터 소리 내 웃는 게 아님을 알게 해 준 너,

밤잠 꼬박 자 준 것도 기특한데 아침에도 울지 않고 혼자 깨어 꼼지락꼼지락 네 발가락 가지고 놀던 너,

숟가락 하나만 쥐어줘도 엄마, 아빠 식사 마칠 때까지 누워서 숟가락을 탐색하던 너.


유치원 마당에서 민들레 꽃을 한 아름 따 들고 와 엄마한테 주면서 수줍게 웃던 너,

'나는 언제 남자가 되는 거야'라고 묻고는 두 눈 똥그랗게 뜨고 내 대답을 기다리던 너,

뽀로로처럼 날고 싶다고 조금만 높은 곳이 있으면 쪼르르 올라가서 뛰어내리던 너,

출근 시간에 늦을까 봐 너를 둘러업고 뛸 때면 업히는 게 좋아 등에서 깔깔깔 소리 내어 웃던 너.


 다른 친구들은 모두 하원한 어린이집에 혼자 남아 엄마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있던 너.

집에 혼자 들어가기 싫다고, 초등학교 운동장 귀퉁이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엄마가 나타나면 눈물 글썽이며 달려오던 너.

공개수업에 참석 못한 엄마를 탓하기는커녕 오히려 엄마를 위로해 주던 너,

서당체험으로 일주일을 엄마와 떨어져 혼자 지내며 얼마나 무섭고 쓸쓸했는지 엄마를 만나자 펑펑 울던 너,

딱 한번 하루만 피아노 안 가고 싶다고 전화기너머로 애원하던 너,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몇 년을 졸라대다 여동생으로 그다음엔 남동생도 좋다고 했던 너,

7년 만에 생긴 남동생을 누가 만지려고 하면 '내 동생이야'라며 손도 못 대게 눈을 부라리던 너,

누나 껌딱지 동생을 한 번도 힘들어하지 않고 준엄마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던 너.


이런 지난날의 널 생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고 어느새 눈물이 나기도 해.

엄마가 너무 서툴러서 너를 자주 외롭게 했고, 쓸쓸하게 만들었다는 걸 그땐 몰랐어.

지금에서야 후회되는 게 참으로 많아.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네가 엄마를 기다리지 않도록 회사 일 따윈 그만두고, 서당체험 같은 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매일매일 손잡고 초등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할 거야. 공개수업은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할 거고, 그토록 부러워하던 파자마파티도 자주 해주고, 친구엄마들하고 식사자리도 많이 만들 거야.


핸드폰을 가지고 친구들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너에게 너무 늦게 핸드폰을 사준 것도 미안해. 엄마의 교육철학이 먼저여서는 안 되는데, 엄마가 답을 정해놓고 너와 대화했던 날이 많았어. 엄마가 너를 통제했던 수많은 날들을 말없이 참아낸 너에게 정말 미안해. 엄마가 예전에도 사과한 적은 있지만 그걸로 네 마음이 다 풀리진 않았을 거야. 그런데도 넌 괜찮다고 얘기해 줬지. 아마도 괜찮으려고 노력했을 거야. 넌 어릴 적부터 너 자신보다는 엄마를 더 위했으니까. 엄마는 애들이 다 그런 줄 알았어. 네가 그렇게 노력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어. 이젠 엄마에게 맞추지 말고 너 자신에게 귀 기울이길 바래. 네 욕구가 무엇인지 뭘 하고 싶은지 그것들에 에너지를 쓰길 바래. 엄마도 늦었지만 너에게서 독립을 하고 있으니 엄마 걱정은 안 해도 돼.


 농촌유학을 신청했을 때, 네가 많이 서운했을 거라는 거 알면서도 진행한 것 미안해. 엄마의 통제가 싫지만 그래도 엄마가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그런데도 넌 엄마한테 괜찮다고 했고, 엄마 없이도 잘할 수 있다고 했어. 늘 양보하고 있다는 거 알아. 네가 얼마나 동생을 사랑하는지도 알고. 그것과는 별개로 질투가 나는걸 알면서도 엄마가 누나인 너만 혼냈던 거 미안해. 늘 너한테만 의젓한 누나이길 요구했는데 너도 그땐 엄마가 필요한 어린아이였단 걸 엄마가 미처 알지 못했어.  


 엄마가 너에게 귀한 손 편지를 받고, 바로 답장을 보냈어야 했는데 너무 늦은 것도 미안해. 편지만 쓰려고 하면 눈물이 나서 몇 번을 쓰려다 포기하곤 했어. 학교 생활이 행복하다는 네 편지를 읽으며 엄마가 기쁘면서도 눈물이 나더라. 그동안 네가 얼마나 많이 상처받고 힘든 시간을 혼자 견뎌냈을지.


 엄마가 한 번도 얘기해 준 적 없었던 거 같아. 엄마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지. 너는 나에게 생명에 대한 무한한 신비로움을 처음 느끼게 해 주었어. 더불어 생명의 존엄함까지. 너로 인해 세상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이 생겼고, 많은  일을 감사하게 되었지.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난걸 처음으로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너는 엄마의 보배이고, 엄마의 우주이고, 엄마가 축복받은 증거야 ~~

 사랑한다 우리 딸!!!!!!!!!!!!!!!!!!!!!!!!!


주인의 끄적임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빈 편지지


정읍 비밀의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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