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내성적이면 네트워킹을 어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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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 미국에서 네트워킹이 취직 시장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썼다. 이번에는 숫기가 없거나, 내향적이거나, 부끄럼이 많은 사람들은 미국에서 어떻게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지 쓰겠다. 역시 아카데미아 위주로 쓰겠지만 비 아카데미아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통 네트워킹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잔뜩 있는 칵테일 파티에 가서 어색하게 두리번두리번 대화하는 걸 생각한다. 뻘쭘하지만 식은땀을 무릅쓰고 대화 나눌 사람을 찾으며 대화의 물꼬를 트고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남겨서 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아카데미아에서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게 대체로 먹히는 네트워킹의 방법은 아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인터뷰 기회를 얻는다거나, 인사이드 정보를 받는다든가, 피드백을 받는다든가, 누군가를 소개받는다거나, 논문을 같이 쓰기로 한다거나 네트워킹에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 바에서 우연히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데이터를 얻었다는 둥, 컨퍼런스에서 누군가와 만나서 논문을 같이 쓰게 됐다는 둥. 너도 나가서 네트워킹해서 이렇게 하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근데 이런 사람 정말 드물다. 적어도 내 분야에서는.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런 네트워킹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이미 잘난 사람들이라서 굳이 네트워킹을 통하지 않더라도 어디선가 매우 쉽게 도움을 받았을 거다. 그치만 주변에선 마치 이런 식의 네트워킹이 늘상 있는 양 이야기하고, 이렇게 못하면 네트워킹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한참 동안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왜 남들처럼 얼굴에 철판 딱 깔고 들이대면서 뭔가를 얻어내지 못하는 걸까 자책을 많이 했다. 교수님도 남들은 다 저래저래 하는 데 왜 넌 못하냐 그러고 ㅠ-ㅠ
이런 식의 네트워킹을 할 때면 공포스러운 경우가 많이 생긴다.
대화를 나눌 사람을 찾지 못하고 뻘쭘히 서 있는 경우
누군가 대화를 시작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어색히 서 있기만 한 경우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했지만 다른 사람이 와서 내가 대화에서 밀려나는 경우
이미 대화가 시작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만 대화에 끼지 못하고 꿔다 놓은 빗자루가 되는 경우
여러 명이 대화하는 도중 나만 모르는 인사이드 얘기를 하는 경우
나와 대화하는 상대가 내게 관심 없는 티가 팍팍 나는 경우
휴~ 정말 공포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한국에선 매우 외향적인 사람이었는데 박사를 하면서 그리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나는 매우매우매우매우 내향적인 사람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난 이런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후달달하다. 이런 상황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라면 "해보고 아님 말지 뭐"라는 마음으로 네트워킹을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특히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는 일단 이런 상황 자체에 매우 스트레스를 받고 긴장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네트워킹은 하기 싫어지고 억지로 하려고 하니 또 잘 안된다. 그러면 더 위축되고. 악순환이다.
박사 졸업한 지 5년째인데, 이제는 이런 방식이 내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내가 실제로 도움을 받은 네트워크는, 내가 네트워킹 목적으로 알게 된 사람이 아니라 정말 친구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칵테일 파티에 가든, 네트워킹 모임에 가든, 컨퍼런스에 가든, 네트워킹 목적으로 누군가에게 접근해서 나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박사 때 친하게 지냈던 동기, 선배, 후배, 그들의 남친/여친/배우자, 그들의 친구들에게서부터는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이들을 "내가 가진 네트워크"라고 생각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내 친구였다. 내 친구들은 비슷한 전공이지만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세부분야가 나와 달라서, 딱히 크게 도움받을 일도 없었다. 어차피 논문 쓰기 시작하면 내 분야 사람들과만 소통하게 되기 때문에, 이 친구들과 논문 얘기는 거진 안 했다. 그냥 밥 같이 먹고, 오후 4시가 되면 커피 마시고, 서로 울고 싶으면 찾아가고, 다독여주고, 생일 파티하고, 여행 가고, 교수님 흉 보고, 운동하고, 장 보러 같이 가는 친구들이었다.
근데 지나고 보니 내게 다리를 놔주거나 어떤 기회를 준 사람들은 이 친구들이었다. 이는 작년 (2020년)에 교환 연구직을 알아보면서 알게 됐다. 이전 편에도 썼지만, 내게 교환 연구직 자리를 알아봐 준 사람, 그런 자리를 아는 사람과 연락할 수 있게 다리를 놔준 사람, 인사이드 정보를 얘기해 준 사람, 인터뷰 기회를 준 사람 등 모두가 내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였다. 나와 만난 적도 없는 한 교수님이 도와준 경우가 있었는데, 이 교수님도 내 친구들을 잘 아는 교수님이라서 연결됐다. 나의 가족 중 한 명도 직장을 알아볼 때 친구의 추천 혹은 아는 교수님의 추천으로 인터뷰 기회를 많이 잡았다.
요약하자면 네트워킹이라 생각하지 말고 평소에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친하게 지내라.
또 도움을 받았던 네트워킹 중 하나는 멘토링 워크샵이다. 각 전공마다 다양한 멘토링 워크샵이 있을 텐데, 내가 도움받은 곳은 우리 전공 여성 멘토링 워크샵 (우리 전공은 완전 남초라서 여자만 모이는 워크샵이 1년에 딱 한 번 있다), 그리고 한-미 학회 멘토링 워크샵이었다. 우선 이런 워크샵은 소수로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지므로 모르는 사람과도 잘 알게 되기 쉽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 먹으며 일 외의 이야기도 나누고. 또 이런 워크샵은 세부분야끼리 하는 경우가 많아서 서로 도움을 주기도 수월하다.
한-미 학회에서 주도한 멘토링 워크샵은 재작년 (2019년)에 참여했다. 내 세부분야 조교수 4명이 한 팀이었고, 각각 멘토로 삼고 싶은 시니어 교수를 선택했다. 일개 조무래기 조교수가 연락하면 뭐가 이뤄질 리가 없으므로, 워크샵 측에서 그 시니어 교수를 초대한다. 이들이 초대되면 이틀 동안 1:1로 내 논문을 깊이 읽고 피드백을 해준다. 그리고 그 시니어 교수의 논문을 내가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런 식으로 내가 선택한 시니어 교수님은 내 논문에 진짜 많은 도움을 줬다. 그리고 워크샵이 끝난 뒤, 내가 교환 교수직을 알아볼 때 이 교수님이 어떻게 내 사정을 알게 돼서 유펜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주셨다. 성사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기억하고 내 논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내 분야에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그리고 작년 (2020년)에 여성 멘토링 워크샵에 참여했는데 2박 3일 동안 호텔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집중 멘토링을 받았다. 세부분야별로 조교수 5명에 시니어 교수 2명씩 7명이 한 조가 된다. 재미나게도 재작년 한-미 멘토링에서 같은 조였던 다른 조교수 1명도 마침 이 워크샵에 지원을 해서 또 같은 조가 됐다. 그리고 더 재미나게도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 동기였다. 좁은 세상! 암튼 여기선 시니어 교수들은 조교수의 레쥬메를 보며 정말 찬찬히 그리고 성실하게 조언을 해준다. 그리고 각자 피드백을 받고 싶은 논문을 미리 제출해서 서로 남의 것을 읽고 돌아가면서 피드백을 해준다. 우리끼리 아침, 점심, 저녁 먹고 호텔방을 다른 조교수 1명과 쉐어하면서 친해질 기회를 충분히 준다. 워크샵이 끝나고 나서 이들에게 암암리에 도움을 받았다. 시니어 교수 중 한 명은 내 지도교수님에게 이메일까지 보내서 00이가 지금 이런 상황에 있으니 **를 지금 쯤 하면 좋지 않겠냐 식의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줬다. 그리고 정말 들어가기 힘든 컨퍼런스에 논문을 냈는데, 마침 레퍼리가 나를 멘토링 했던 시니어 교수였다. 이게 작용한 건지 아님 정말 내 논문이 맘에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정말정말 들어가기 힘든 컨퍼런스에 논문이 채택이 됐다. 줌으로 컨퍼런스를 하는데 내가 발표를 마치고 나니, 같은 조에 있었던 다른 조교수가 따로 메시지를 보내서 피드백을 해주기도 했다.
꼭 워크샵이 아니더라도 페이스북에 소규모 네트워킹 그룹이 있다. 여기에 본인이 생각했을 때 잘 어울리는 그룹에 들어가서 자기소개하고 다른 사람들은 뭐 하고 있나 쭉 읽다 보면 분명 내 분야와 관련 있는 사람이 나온다. 이런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서 내가 이러저러한데 질문이 좀 있어서 혹시 15분 정도 줌 가능하시냐? 하면 대체로 응해준다. 요즘은 팬데믹 때문에 실제로 만나지 않고 줌으로 하니까 서로 부담이 적다. 이 관계가 얼마나 오래 깊이 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인사이드 정보를 얻는 데에는 꽤 효과적이다. 가끔 이상한 사람도 있으니 너무 상처 받진 말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포의 네트워킹에 처하게 됐을 때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쓰겠다. 나도 이건 멘토링 워크샵에서 배운 거다. 이런 식으로 네트 워킹한 사람들과 아직도 연락하는 경우는 제로지만 그래도 한 두 번 이메일은 주고받았다.
칵테일 파티나 큰 컨퍼런스에 가기 전에, 미리 본인이 말 붙이고 싶은 사람을 한 두 명 정한다. 그리고 자기소개를 하며 내가 이러저러해서 너랑 좀 얘기를 했음 좋겠는데 바쁘지 않으면 30분 정도 나와 커피 마실 수 있겠는가?라고 이메일을 보낸다. 보통 이러면 완전 대가나 무지 바쁜 사람이 아닌 이상은 거의 대부분 응해준다. 이러면 생판 모르는 내가 뻘쭘하게 다가가서 어떻게든 대화의 물꼬를 틀려고 하지 않아도 만남이 성사된다. 이 30분을 통해 이 사람이 내 네트워크가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나마 덜 무섭고 부담감이 적은 네트워킹 방식이다.
만약 같은 분야 친구가 있다면, 이런 모임에 같이 갈 수 있도록 미리 조율한다. 일단 컨퍼런스나 사교의 장에 가면 친구라 하긴 뭐 하지만 어쨌든 이름과 얼굴은 서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도 스타나 대가가 아니라면 딱히 말 붙일 사람이 없으므로 컨퍼런스에서 만나면 서로 굉장히 반가워한다. 내가 그런 사람 2-3명, 그리고 내 친구가 그런 사람 2-3명을 모아서 같이 점심 먹고 저녁 먹고 아이스크림 먹고 그러다 보면 한 이틀 동안은 이런 그룹이 같이 붙어 다니게 된다. 꼭 분야가 같지 않아도 이건 가능하다. 컨퍼런스나 파티가 끝나면 아마 내 친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과 계속 연락하고 지내진 않을 거다. 뭐 그럴 수도? 근데 우리 과에서 누굴 뽑는다는 공지가 내려왔을 때 문득 그때 이틀 동안 놀았던 사람이 생각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지원하라고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고, 그 사람을 우리 과에 추천할 수도 있다. 혹은 내가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 딱히 물어볼 사람이 마땅치 않을 때, 그때 같이 놀았던 친구의 아는 사람에게 쉽게 연락을 할 수 있다.
나중에 한 번 쓰겠지만 미국에서는 오늘 보고 말 사이더라도 굉장히 잘 논다. 난 이게 이해가 안 갔다. 아 다신 안 볼 사람인데 뭐 열과 성을 다해서 같이 놀지? 내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를 왜 다신 안 볼 사람에게 오늘 투자해야 하는 거지? 근데 미국애들은 이런 짧은 만남을 굳이 마다하지 않더라. 슈퍼마켓에서 줄 서 있는데도 오늘 날씨가 어떻죠 부츠가 예쁘네요 이런 말 서로 나누는 것도 미국애들은 암시롱 않게 생각하는 걸 보면, 지나가는 인연이라도 굳이 말 안 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나 보다. 우리나라에선 지나가는 인연이라면 굳이 말을 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오늘내일 이 사람이랑 붙어 다녀 봤자 서로에게 딱히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싶을 수 있다. 실제로 도움을 못 받을 가능성이 크더라도 그런 이유로 당장 이 사람이랑 어느 정도 친분을 쌓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정말 미래에 아무 도움이 안 된다. 그렇다고 "저 사람이랑 베프되야징!"이런 마음으로 접근하면 너무 기 빨리고 현타가 오기에, 애초에 마음가짐을 "이 사람은 오늘내일 만나고 말 사람이지만 나중에 문득 생각날 수는 있는 사람"정로도 가지면 부담이 그나마 적어진다. 잘 어울리지 못한다면 그런 순간은 하루 이틀이면 지나갈 거고, 앞으로 안 만나면 그만이다. 잘 어울리게 된다면 앞으로 인연이 닿든 아니든 일단 오늘내일이 즐거운 것만으로도 꽤 좋은 이틀을 보낸 거 아닌가. 그러다 미래에 다시 연이 닿으면 더 좋은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