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네트워킹. 보장할 순 없지만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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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미국에서 네트워킹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는 지 쓰려고 한다. 좋게 말하면 네트워킹이지만 사실은 결국 학연, 지연, 혈연 덕을 보는 것. 내가 속한 아카데미아 기준으로 썼지만 구직 활동 중인 가족의 경우를 보니, 분야도 다르고 아카데미아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사 석사 친구들이 알음알음 연락이 오더라. 이런 자리가 있다고 알려주기도 하고, 내가 너를 어디에다 추천했다고 하기도 하고. 이게 전문직에만 해당이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른 분야는 어떤가요?
지난번에 배우자 고용제에 대해 썼다. 그의 연장선상으로 미국에서 인맥 혹은 네트워킹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써보려 한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미국은 어찌 보면 지나치게 원칙주의인 것 같지만 어떨 때는 정말 원칙이란 게 뭔가 싶을 정도로 알음알음 처리되는 일이 많다. 배우자 고용도 그렇고 다른 고용에 있어서도 아는 사람 통해서 알음알음 사람을 구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
우리 학교에서 교환 교수 (visiting professor)를 거의 매년 구한다. 다른 학교/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교환 교수를 보통 티칭 땜빵을 위해서 고용한다. 다음 학기에 열려야 할 수업은 많은데 가르칠 사람이 늘 부족해서 매년 1명에서 2명은 이렇게 교환 교수를 쓴다. 아참, 참고로 교환 교수는 소속이 없어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내가 우리 학교에서 종신 임용이 안돼서 떠나야 한다 치자. 보통 1년의 유예기간을 주는데 만약에 내가 그 기간 동안 다른 곳을 찾지 못하면 아마 다른 학교 교환 교수로 갈 거다. 내가 적을 두는 곳은 없지만 짧게 1-2년 동안 다른 학교에서 잠깐 가르치고 그 사이 열심히 구직활동을 해서 다른 학교로 옮기는 식이다.
암튼 내가 속한 곳에서 교환 교수직은 공고를 따로 내는 건 아니다. 우리 과 내에서도 누가 어떻게 교환 교수로 오는지 서로 모를 정도로 암암리에 결정된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경우는 (1) 잡마켓 후보들 인터뷰를 하고 나서 마음에는 들지만 완전히 고용하기는 좀 아쉬운 사람에게 이런 자리를 제안하거나 (2) 아는 사람 중에 소속이 없어지는 (보통 종신 임용이 안 됐거나 종신 임용 전에 시간을 조금 더 벌고 싶어 하는) 사람을 추천받아 결정한다. 내가 1-2년 차 때 본 교환 교수 2명은 (1)에 해당한다. 그리고 3-4년 차에 본 교환 교수 2명은 (2)에 해당한다. 교환 교수가 아무리 짧은 자리여도 채용 공고를 따로 내지 않는 것도 충격적이었는데, 아는 사람 통해서 알음알음 이런 자리가 채워진다는 건 더 놀랍다.
이 중 한 명은 내 추천으로 교환 교수가 된 경우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우리 과 동료가 추천해서 됐다.). 박사 때 나보다 2-3년 선배인 R인데 본인이 있던 학교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학교로 옮기고 싶어 했다. 근데 옮기기엔 연구 실적이 눈에 띄는 정도가 아니기 때문에 1-2년 시간을 벌면서 연구 실적을 올려서 다른 학교로 이직하려고 했다. 마침 우리 과에서 교환 교수를 2명 뽑는다고 추천하라고 하길래 R 선배를 추천했다. 추천을 하면 일단 레쥬메를 우리 과 교수들 중에서 채용 담당자에게 보낸다. 참고로 채용 담당자는 한 명은 아니고 적어도 3-4명 정도 되고 돌아가면서 한다. 나도 채용 담당을 했던 적이 있다. 암튼 레쥬메를 받으면 간단히 전화로 인터뷰를 한다. 팬데믹 전에도 그냥 전화로 하더라. R 선배에게서 나중에 들었는데 대충 무슨 연구 하냐, 이 과목 저 과목 가르칠 수 있냐 등등을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터뷰의 최상의 목적은 이상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것 같다고 하더라. 어디나 그렇겠지만 우리 분야 사람들 중에 또라이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하루 만에 교환 교수로 책정됐다. 롸? 이렇게 알음알음 된다고?
암튼 우리 과에서 1년을 보내고 R 선배는 다른 학교에 전임강사로 가게 됐다. 연구가 재밌지만 성과가 너무 안 나오니까 그냥 그만하겠다고, 이제 티칭만 하고 싶다고 전임강사를 택했다. 근데 이 전임강사가 된 경우도 완전 인맥이다. R과 박사 동기였던 M이 그 사정을 듣고 마침 자기네 학교에서 전임강사 뽑는다면서 R을 추천했다. 전임강사는 교환 교수에 비해서는 그래도 체계가 있다. 나름 공고를 내고 인터뷰도 여러 명과 하고, 가상 수업도 시켜본다. 이미 M네 학교에서 인터뷰 볼 사람을 여러 명 추려 놨는데 R은 지원도 안 한 상태였다. 하지만 M이 추천을 하니 일단 인터뷰 기회는 줬다.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아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붙여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터뷰를 받을 기회는 주는 것. 이게 네트워킹으로 이뤄진다. 결국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R이 월등히 레쥬메도 좋고 가상 수업도 잘해서 뽑혔다.
우리 과에서 2020년 가을부터 시작할 전임강사를 모집 중이다. 그럼 혹시 잘 맞을 법한 사람 있으면 추천하라고 과 전체에 이메일이 돈다. 그럼 각자 본인이 생각했을 때 잘 맞을 법한 사람을 추천한다. 내 박사 선배 중에 "와 이런 사람이 박사 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한 정말 똑똑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잡마켓에서도 스타 중에 스타였고, 이 사람 논문 때문에 엄청난 조작이 밝혀져서 신문과 뉴스에서 인터뷰도 정말 많이 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아이비리그 학교에 조교수로 갔는데, 듣자 하니 몇 년 전 전임 강사가 됐다는 거다. 박사 때 이 사람을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기는 한다. 아무튼 전임 강사 추천하라길래 이 선배에게 혹시 관심 있냐고 물었는데, 마침 자기도 옮기고 싶었다면서 지원하겠다고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임강사가 아니더라도 이 사람은 우리 과에서 채용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과에서 백 년 노력해봐야 이 사람이 썼던 논문 수준에 미치지 못할 거다. 이 선배는 굳이 누가 추천하지 않아도 완죠니 낭중지추라서 뭐 이런 인맥이 굳이 필요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추천을 하면 떨어뜨릴 사람도 한 번은 다시 보고 인터뷰 기회도 주고 좀 더 신경을 쓰는 건 맞다.
나도 그렇다. 박사 때 동기였던 친구가 몇 년 전 문자가 왔다. 자기네 학교에서 내 분야 사람을 뽑는데 너가 생각났다고. 지금 당장 지원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후보들 인터뷰를 해보고 딱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나도 의도치 않게 내 인맥에 덕을 봤다. 결국 다시 연락은 안 왔지만, 내게 그런 자리가 있고, 나라는 존재를 그쪽 채용담당자들이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덕이었다.
또 한 친구는 지도교수님을 통해서 만나게 된 교수인데, 자기네 학교에서 내 분야 뽑는다고 생각 있냐고 연락이 왔다. 역시 나는 지원을 따로 하지 않아도 되지만 나는 그 학교에서 고려하는 후보가 된 거다. 그들의 채용 과정이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내게 인터뷰를 줄지 안 줄지는 모르지만, 내가 지원하지도 않았는데 나를 후보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인맥 덕이라 생각한다.
종신 임용 전 시간을 좀 벌고 싶어서 다른 연구소에 교환 연구직이 있나 몇 년 전부터 알아봤다. 이때도 정말 생각지 못한 곳에서 인맥이 발동했다. 그냥 박사 동기들에게 푸념하면서 "나 종신 임용 안 될 거 같아ㅠㅠ 어디 교환 연구자로 가면 좋을 텐데"라고 얘기했는데, 동기들이 알음알음 자기네 연구소나 친구네 연구소에 자리가 있는지 알아봐 줬다. 알아봐 준 것뿐만 아니라, 교환 연구직을 담당하는 사람 이메일을 보내주면서 나를 소개해준 적도 정말 많다. 어쩌다 이 얘기가 내가 존경하는 멘토 귀에도 들어갔는지, 그분이 날 유펜에 교환 교수로 추천도 했다. 또 나랑 단 한번도 말해본 적 없는 먼 학교 교수도 내 사정을 듣고 기꺼이 1시간 동안 본인이 알고 있는 자리를 소개해줬다. 심지어 여러군데 교환직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나를 소개해주고. 따흑 감사합니다. 이렇게 친구들과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있는지도 모르는 자리들을 알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과에서 교수를 뽑을 때도 아는 사람 있으면 추천하라고 이메일이 쫙 돈다. 그러면 각자가 생각했을 때 괜찮은 사람이 있으면 추천을 하고, 그 사람이 지원하지 않았더라도 관심 있냐는 연락이 갈 수 있다. 그러다가 잘 맞아떨어지면 fly-out도 오는 거고. 그러다가 오퍼가 가고. 우리 과에서 채용할 때도 이랬다. 지원과 무관하게 일단 fly-out을 줬고 결국 그런 사람 2명에게 오퍼가 갔다.
교환 연구직을 활발히 알아볼 때, 내가 박사 하던 도시에 있던 연구소에서 교환 연구직이 열렸다. 내 박사 커미티에 있었던 교수님이 그 연구소와 긴밀하게 연관이 있어서 다짜고짜 이메일을 보냈다. "교수님 제가 교환 연구직을 알아보고 있는데요 주저리주저리 통화 가능할까요?" 교수님이 바로 답장이 와서 당장 전화하라고 했다. 교수님은 그 바쁜 와중에도 이 자리가 실제로는 어떤 사람들도 채워지는지, 공지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대체로 어느 분야를 뽑고 싶어 하는지, 이번에 쟁쟁한 사람 누구누구가 지원했으니 아마 힘들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얘기해줬다. 내가 될 가능성은 낮지만 또 혹시 모르는 거니까, 나보고 연구 계획서를 이런저런 방향으로 쓰라고 조언까지 해줬다. 결국 여긴 안 됐지만 이 교수님 덕분에 이 곳에서 누굴 기대하는지, 내가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작년에도 교환 연구직을 하나 지원했다. 박사 때 1년 선배였던 사람이 본인이 속한 연구소에서 교환 연구직을 담당하게 됐는데 많이들 지원하라며 박사 졸업생들에게 이메일을 쫙 돌렸다. 공지를 보니 분야 구분 없이 뽑는다고 써 있었다. 이 선배는 나랑 딱히 친하지도 않았지만 일단 내 레쥬메와 이메일을 보냈다. 구구절절 "너도 알다시피 내 분야는 너네 연구소에서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은데 나도 가능성이 있냐? 너네 연구소랑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 위주로 뽑을 거냐?" 질문을 했고 정말 친절하게 하나하나 대답을 해줬다. 그리고 내 레쥬메에 요런 요런 연구가 좀 어필이 될 것 같으니까 요런 방향으로 연구 계획서를 쓰면 아마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고무적인 얘기를 해줬다 ㅠ-ㅠ 이런 식의 인사이드 정보를 공지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까 내겐 정말 많이 도움이 됐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당장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방긋방긋 웃으며 네트워킹을 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내 의견은 좀 다르다. 휴 내가 생각하는 네트워킹을 하는 방법도 쓰려고 했는데, 이건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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