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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딸기체리수박 Sep 07. 2021

성격 급한 다혈질 마이크로 매니저와 일하게 됐다_1

퇴사자의 변명

 이 글을 읽고 있는 많은 직장인들처럼, 나도 살면서 나름대로 최악의 상사들을 많이 만났다. 성격이 너무 급해서 나노 단위로 일을 재촉하는 사람도 있었고, 화나면 소리 지르고 화내는 다혈질도 있었고, 세세한 것들을 하나씩 다 챙기면서 사람 미치게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다 갖춘 사람도 있었다.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에다가, 초나노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면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그런 사람. 게다가 그 사람은 남들보다 체력도 월등하게 뛰어나서, 도무지 지치지도 않았다.


 지금부터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조금 끄집어 내보려고 한다.


 그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일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실무를 할 때부터 업무에 대해 두각을 나타냈고, 그것이 그의 자랑이었다.


 내가 그와 처음으로 함께 일하게 되었을 때, 그는 팀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임 보직자였다.


 그 사람, 장팀장은, 실무자일 때부터 갈고닦아왔던 업무 실력을 보여주며 본부장과 이사진들의 총애를 받았다. 난 그렇게 총애를 받고 있는 장팀장의 팀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참 기대가 컸다.


 총애를 받고 있는 팀장 밑에서 일하면, 나도 자연스럽게 총애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순진한 생각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장팀장의 팀으로 배정받은 바로 그날. 뭔가 잘못되었음이 느껴졌다.


 “김대리, 일단 우리 팀으로 온 거 환영하고, 김대리가 하게 될 업무 관련한 미팅이 오늘 10시, 11시, 1시에 있어.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돼. 이러면서 배우는 거니까. 내가 모든 회의 다 같이 들어갈 거야. 회의하면 회의록 정리하는 건 알지? 양식은 회사 공용 폼으로 하고. 우리는 식사 보통 팀끼리 같이 하거든? 식사도 업무의 연장선이니까, 간단하게 회의하면서 식사할 거고... 어쩌고... 저쩌고... 가급적 식사 관련 개인 약속은 잡지 않았으면 좋겠고... 의무는 아닌데 가급적 내가 불편한 게 아니면 식사는 같이 하고... 어쩌고... 저쩌고...”


 일단, 들어가자마자 그날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세 개나 있다는 것도, 대놓고 밥 관련 개인 약속을 잡지 말라고 하는 것도...뭔가 좀 이상했다. 반기를 들고 싶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팀에 와서 처음부터 이런 것들을 문제 삼긴 어려웠다.


 그렇게 그날 오전 10시. 첫 회의가 시작되었다. 내 전임자는 이미 갑자기 퇴사해버린 뒤였고, 전임자도 없는 상태에서 회의를 시작하게 된 나는, 몹시 긴장되었다.


 하지만, 장팀장은 마치 본인이 실무자였던 것처럼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다.

 “그건 디자인이 이거 아닌데...이거 글자 살짝 위로 간 것 같지 않아요? 그때 전화로 말했는데... 이거 좀 내려야 될 거 같은데. 그리고 이거 위원들 중에 이 사람은 안 된다고 했었어요. 지난주 수요일? 목요일 이쯤에 아마 메일 갔을 텐데... 이거 왜 이거 내가 챙겨야 되는 거야?”


 그는 거의 최전방에서 업무에 대한 세세한 내용까지 업체와 조율했다. 나는 그의 말들을 받아 적기 바빴다. 그가 원하는 대로 회사 공통 회의록 양식에 맞게 예쁘게 자료 정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가 내는 의견들을 정리해서 적기에도 바빴다. 회의는 10시 58분쯤에 끝났고, 11시에 또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11시에 회의가 시작하자, 장 팀장은 내게 개인 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김대리, 10시 회의 회의록 보내줘.’


 뭐지? 10시 회의가 끝난 것은 불가 불과 3분 전이었다. 게다가 바로 11시 회의를 시작했다. 근데 지금 회의록을 달라고?


 ‘팀장님, 지금 형식에 맞게 정리 중인데 이 회의 끝나고 바로 보내드리면 안 될까요?’

 ‘그냥 지금 바로 보내.’


 11시 회의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고, 장팀장은 카톡을 보내면서도 계속 본인의 의견과 업무에 대한 내용을 쉬지 않고 얘기했다.


 난 그가 11시부터 한 말을 받아 적으면서, 10시에서 11시 사이에 한 말을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초조하고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장팀장은 끊임없이 업무에 대한 온갖 세부적인 사항들을 조율하면서, 내게 계속 카톡 했다.

 ‘그냥 빨리 보내줘. 지금까지 정리된 거라도 보내.’

 

 일부러 날 압박하는 건가? 기선제압인가? 난 그의 성화에 못 이겨, 10시 회의록을 송부했다. 내가 장팀장에게 보낸 카톡에 ‘1’이 사라졌고,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한숨을 보자 또다시 불안해졌다. 그에게 다시 카톡이 왔다.


 ‘김대리, 이거 양식 제대로 안 써봤어? 한 문장에서 단어가 짤리면 Alt+shift+N 눌러서 조정해야지. 이거 내가 이런 거까지 챙겨야 돼?’

 ‘그리고 두 번째 문장부터는 띄어쓰기 두 번 해야 되는 거 알지? 지금 이거 두 번인 거랑 세 번인 거 섞여 있어. 이거 신입 때 제대로 안 했어?’


 나도 그런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난 10시 58분까지 회의를 하고 있었고, 11시부터 새로운 회의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온전히 회의록을 정리할 수 있는 10분만 나에게 주어졌어도, 난 제대로 된 회의록을 들이밀 수 있었을 것이다.


 억울했지만, 난 그 카톡을 보고도 변명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 카톡을 보내면서도 그는 회의에서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인간이 이렇게 뇌를 분리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그와 회의를 하다 보니 내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점심을 먹고 와서 1시부터 또다시 회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1시 회의는 12시 20분이 돼서야 끝났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장팀장은 내게 파리바게트에서 샌드위치를 사 오라고 시켰다.

 “점심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지금 파리바게트에서 우리 팀원들 숫자 맞춰서 샌드위치 좀 사 와. 그리고 1시까지 회의록 보내고. 내가 카톡에 남긴 사항들 유의하고.”


 장팀장이 내게 욕설을 내뱉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샌드위치를 사러 가면서도 온통 회의록을 정리할 생각뿐이었다. 난, 자리에 앉아서 샌드위치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회의록을 정리했다.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았던 10시 회의록도 다시 정리했다.


 “장팀장님, 지금 메일로 10시 회의록이랑 11시 회의록 보내드렸어요...”


 장팀장은 그 말을 듣자마자 메일을 확인했다. 그러곤,

 “박대리, 내가 말한 대로 하니까 확실히 회의록이 더 낫네. 10분 있으면 회의 시작하니까 영상 회의 이거 세팅해두고, 그리고 아까 10시에 회의할 때 우리가 업체에 말한 거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고, 반영된 거 있으면 반영된 대로 다 보내라고 해. 바로바로 확인하고 피드백하고, 어쩌고 저쩌고 저쩌고…”


 하루 만에 이렇게 사람에 질리게 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내가 새로운 팀에 배정받은 그 시기는 업무가 꽤 한가한 시기였다. 장팀장은 이 여유로운 시기에 사람을 이렇게 쪼아댔던 것이다!


 그럼, 팀이 바쁠 때는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투비 컨티뉴


이미지 출처: http://m.hrinsight.co.kr/view/view.asp?in_cate=113&bi_pidx=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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