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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히니 Jul 11. 2021

새끼발가락이 경고하고 있다!

퇴사자의 변명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새끼발가락에 꽤 큰 점이 있다. 내가 그 점을 인지하게 된 순간부터 그 점은 늘 왼쪽 새끼발가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족들도 이 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발가락에 이렇게 큰 점이 있었네?"


 가끔 부모님은 내 새끼발가락에 있는 점을 보고 신기해하곤 했다. 아주 어릴 때는 없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큰 점이 생겼는지 말이다.


 그렇게 난 오랜 시간을 그 점과 함께해왔고, 그 점이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점은 내 몸의 일부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점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갑자기 그 점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퇴사하고 한 두 달쯤 지나서였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는데, 뭔가 허전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여기 원래 점이 있었는데? 왼쪽이 아니었나? 왼쪽 맞는데...?'


 갑자기 사라진 점을 찾으려고 발을 구석구석 살펴보았고, 반대발까지 살펴보았지만 갑자기 점은 사라졌다. 너무 신기해서 가족들에게 발가락을 보여주며 돌아다녔고, 가족들도 이게 무슨 일인지 놀라워했다.


 그때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주기적으로 새끼발가락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알아낸 사실이 하나 있다.


 놀랍지만,

 난 힘들면 새끼발가락에 큰 점이 하나 생긴다. 그리고 좀 살만하다, 싶으면 점이 서서히 옅어지고 사라진다. 이게 좀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진짜로 점이 생겼다가 없어지고 또 생겼다가 없어진다. (진짜 신기하죠?)


 힘든 시간이 계속되면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쳐서 점의 크기가 약간 커지고 진해진다. 그리고 상황이 좀 나아지고 그런 상황이 조금 길어지면, 몇 주, 혹은 몇 달에 걸쳐서 점이 흐려지고 이내 사라진다. 퇴근하고 기분 좋아지면 점이 없어지고, 출근하기 전에 우울하면 점이 생기는 그런 실시간 시스템은 아니다.


 추측하건대, 내가 점의 위치를 인지하고 나서 점이 사라지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은 그 이후로 내가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최소 몇 주 간은 연속적으로 좀 편한 마음을 가지고 생활해야 하는데, 회사를 다니면서는 그런 적이 아예 없기 때문이었다. 퇴사를 하고 나서야 늦잠도 자고 여유 있는 생활을 일정 기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제야 점이 사라진 것이다.


 주변에서 점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이러는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쩌면, 새끼발가락 점은 힘든 시간을 참고 참다가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해! 이제 여긴 한계야! 쉬어야 해! 회사가 중요한 게 아니야!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


 생각해보면, 회사를 다니면서 정신 타격도 만만치 않게 받았지만, 그 정신을 따라 육체적으로 받은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끔은, 회사를 다니면서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질환이 심해져서 주기적으로 스테로이드나 항히스타민제를 먹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했다. 심지어, 스테로이드 성분이 포함된 주사를 맞아야 할 때도 많았다.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약들은 워낙 독해서, 약을 오래 먹은 다음에는 약을 줄이기가 어려워 임신이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지나친 컴퓨터 문서 작업 때문에 안구가 건조해져서 쉽게 안구에 상처가 나고, 습관성 짓무름이 생겨서 이제는 아침에 인공눈물을 넣지 않고 눈을 뜨면 눈에 상처가 쉽게 생긴다. 손목은 터널 증후군으로 늘 시큰거리고 욱신거렸다. 목과 어깨도 늘 결렸다.


 그뿐인가? 평생 건강할 줄 알았던 '위'. 건강한 구석이 별로 없는 나라는 사람에게, 위가 건강하다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둔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회사를 다니며 극도의 스트레스로 몇 차례 급성 위경련을 겪고 난 이후에는 걸핏하면 통증이 느껴졌다.


 난 저런 와중에도 퇴사하지 못하고 힘들면 토하면서 일하고, 울면서 일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살았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우울함에 눈물이 날 때가 있어도, 그냥 꾸역꾸역.


 어쨌든, 수년 간 계속 새끼발가락에 있던 그 점은, 내가 퇴사하고 얼마 뒤 사라졌다. 그리고 한 동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앓아 왔던 많은 질환들도 증상이 많이 옅어졌다. 퇴사했지만, 예전보다 더 건강해진 몸에 만족했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만한 힘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회사라는 울타리를 떠나서 어려워진 점들도 있지만,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신체의 건강함이라는 것을, 퇴사하고 나서 더 강하게 느꼈다.


 새끼발가락은 계속 경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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